영화 시사평

썬더볼츠*(2025) 리뷰: 버리지 말자는 약속, 모두에게 지키지는 못했다

LUX · 2026년 10월 22일

옐레나가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진다. 암살 일을 하는 사람이다.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다. 독백에서는 삶이 텅 비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출발이 좋다. 몸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아는데, 마음은 왜 해야 하는지 답하지 못한다. 언니를 잃고 암살 일을 반복하는 옐레나에게 부족한 것은 실력이 아니다.

세계의 운명을 맡겨도 될 실력이다. 출근은 괴롭다. 이 짧은 간격에 《썬더볼츠*》가 다른 영웅 영화와 갈라지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옐레나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보여주면서, 그 능력이 정작 자신을 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적을 쓰러뜨리는 일과 내일을 기다리는 일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 팀이 얼마나 강한지보다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따라갔다. 고용주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저절로 서로를 아끼게 되지는 않는다. 함께 싸우는 동료를 쓸모가 다한 뒤에도 붙들어 줄지가 중요하다. 싸울 때만 필요한 사람이라면 고용주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 영화의 다정함도 그 기준으로 따져야 한다. 중심인물에게 건넨 위로가 다른 팀원에게도 돌아가는지 끝까지 봐야 한다.

《썬더볼츠*》는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사람도 버리지 말자고 설득하지만, 그 약속을 모든 인물에게 지키지는 않는다.

잘 싸운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도입의 낙하가 정확히 보여주는 것은 옐레나의 능력보다 그 능력의 한계다. 나는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더 어려운 임무가 아니라 살아갈 이유라고 본다.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행동은 대담하지만, 공허함을 말하는 독백에는 기운이 없다. 영화는 둘 중 하나를 거짓으로 만들지 않는다. 일은 능숙하게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사는 사람이 여기 있다.

이 차이를 먼저 보여주니 이후의 싸움도 다르게 읽힌다. 옐레나가 적을 상대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회복됐다고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몸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인물의 슬픔을 내세워 액션을 대충 처리하지도 않는다. 육탄전에서는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따라가기 쉽다. 차량이 움직이는 대목에서도 사람과 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이 선명함을 높이 산다. 싸우는 모습을 잘게 끊어 힘을 과장하기보다, 인물들이 실제로 무엇을 해내는지 보여준다. 덕분에 이들이 무능해서 버림받았다는 오해부터 지워진다.

문제는 실력의 부족이 아니다. 고용주인 발렌티나는 불법 실험을 숨기려고 요원들을 같은 시설로 보낸다. 일을 맡기는 척하면서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계획이다.

여기서 버림받는다는 말은 단순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들의 목숨은 고용주의 비밀보다 값이 낮게 매겨진다. 아무리 임무를 잘해도 그 계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탈출을 위해 힘을 합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장 살아남으려면 서로의 능력이 필요하지만, 필요하다는 말과 소중하다는 말은 다르다. 영화가 넘어야 할 문턱은 바로 그 차이에 있다.

이 점에서 읽기 쉬운 액션은 감정 이야기와 따로 놀지 않는다. 싸울 능력을 충분히 보여줬으니, 영화는 다른 부족함을 물을 수 있다. 이들에게 없는 것은 적을 쓰러뜨릴 기술이 아니라 자기 편이라고 믿을 사람이다.

나는 전투에서 제 몫을 하는 모습보다 그다음이 궁금해졌다. 누군가 더는 싸우지 못할 때도 이 임시 팀은 그를 데리고 갈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는 이들을 전투 능력 말고 무엇으로 기억하게 만드는가?

퓨와 풀먼은 무기보다 사람을 먼저 보여준다

퓨와 풀먼은 이 팀을 구경하는 대신 걱정하게 만든다. 얼마나 강한지 알기 전에, 혼자 두면 안 될 사람이라는 마음부터 들게 한다.

옐레나를 연기하는 플로렌스 퓨는 첫 독백부터 목소리에 피로를 남긴다. 빈정거리는 말투가 나와도 그 아래 깔린 슬픔까지 지우지는 않는다. 높은 곳에서 거침없이 뛰어내리는 몸과 기운이 빠진 목소리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 어긋남 때문에 옐레나를 믿었다. 임무를 해낼 때마다 마음까지 튼튼해지는 사람으로 꾸미지 않아서다. 퓨는 잘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이 사람에게 또 일을 맡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붙잡아 둔다.

루이스 풀먼이 맡은 밥은 시설에서 일행과 만나는 실험 생존자다. 기억도 자신감도 부족한 그의 소심한 태도는 주변의 능숙한 요원들과 뚜렷이 다르다. 풀먼은 그 차이를 웃음거리로만 쓰지 않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놓인 불안을 남긴다.

이후 밥이 엄청난 힘에 휘둘릴 때도 처음 만난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위협이 커질수록 나는 그 힘보다 밥이 얼마나 버틸지가 신경 쓰였다. 강해졌으니 이제 괜찮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않는 연기다.

그래서 옐레나와 밥이 가까워지는 과정도 서로의 능력을 탐내는 만남으로 읽히지 않는다. 한 사람은 일을 잘해도 공허하고, 다른 사람은 힘을 얻어도 자신을 믿지 못한다. 둘 다 능력이 살아갈 이유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퓨의 지친 말투와 풀먼의 자신 없는 태도 사이에는 서로 알아볼 만한 외로움이 있다. 둘의 관계를 연애의 설렘으로 밀지 않은 선택도 좋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이유가 꼭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 필요는 없다.

나는 이런 팀을 좋아한다. 채용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버키 역의 세바스찬 스탠은 합류할 때 무뚝뚝함과 위압감으로 팀을 정리하지만, 정작 자기 마음이 바뀌는 시간은 적다.

발렌티나 역의 줄리아 루이드레이퍼스는 공적인 말투로 비열함을 포장해, 사람보다 쓸모를 먼저 보는 고용주를 또렷하게 세운다.

발렌티나에게 이들은 처리해야 할 요원이지만, 퓨와 풀먼의 연기는 그 계산에서 빠진 얼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람을 먼저 보게 만든 이 연기는 마지막 문제를 푸는 방식에도 이어지는가?

위로를 치료법이라고 읽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마음의 병을 간단히 치료한다고 읽지 않는다. 폭력으로 풀지 못하는 문제 앞에서 동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영화다.

밥은 실험으로 초인적인 힘을 얻었다. 센트리는 그에게 붙은 영웅 이름이다. 하지만 그 힘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밥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지 않는다. 강해지는 것과 괜찮아지는 것은 여기서도 다른 일이다.

밥의 어두운 내면과 연결된 파괴적 존재인 보이드도 구분해서 봐야 한다. 보이드는 현실의 우울증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람의 고통을 눈앞의 위협으로 바꿔 보여주는 영화 속 존재다.

이 방식이 고통을 단순하게 만든다는 지적은 맞다. 마음속 괴로움에 맞서 싸울 대상을 붙이면 설명은 쉬워진다. 대신 사람마다 다른 고통의 사정은 충분히 담기 어렵다.

그렇다고 영화가 고른 대응까지 간단한 치료법으로 묶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마지막 대결은 누가 더 강한 주먹을 가졌는지 겨루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나는 이 선택이 도입의 옐레나를 잊지 않은 결과라고 본다.

옐레나는 처음부터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족했던 것은 적을 제압하는 힘이 아니라 내일도 살아갈 이유였다. 마지막 문제를 전투력으로만 풀었다면 영화는 자기가 세운 출발점부터 배신했을 것이다.

주먹으로 마음까지 고친다면 영웅들은 전부 명의다. 아니다.

동료가 곁에 있다는 말도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도움을 받을 사람이 생긴 상태와 도움이 필요 없어진 상태는 다르다. 나는 밥에게 필요한 도움이 끝났다고 보지 않는다. 이제 그 도움을 혼자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영화의 위로가 있다.

누군가를 도우려면 반드시 그 사람의 문제를 전부 고쳐야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당장 답을 내놓지 못해도, 그를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는 일은 남는다. 나는 이 영화가 동료에게 맡긴 몫이 바로 거기라고 본다.

무기로 쓰이던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은 싸우지 못하는 순간에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영화는 옐레나와 밥을 통해 그 태도를 충분히 설득한다. 그런데 함께 있어 주자는 약속은 팀의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는가?

옐레나에게 준 다음 삶을 모두에게 주지는 않는다

《블랙 위도우》와 나란히 보면 이 영화의 성취와 편애가 함께 드러난다. 옐레나에게는 무기에서 벗어난 다음 삶을 묻지만, 태스크마스터에게는 충분히 묻지 않는다.

두 영화를 잇는 질문은 누가 더 강해졌느냐가 아니다. 남의 명령으로 싸우던 사람이 자유를 얻은 뒤 어떻게 살아가느냐다. 나는 이 기준에서 옐레나의 이야기를 이어 간 선택을 높이 산다.

누군가의 지배에서 벗어났다고 아침에 일어날 이유까지 생기지는 않는다. 옐레나는 암살 일을 능숙하게 해내지만, 그 반복 속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자유는 얻었는데 무엇을 위해 써야 할지는 여전히 어렵다.

영화는 그 막막함을 옐레나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는다. 강한 사람이니 알아서 견디라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첫 독백부터 그 마음을 들려주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시간도 준다.

태스크마스터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블랙 위도우》에서 타인의 통제 아래 무기로 쓰이다 구출된 인물이다. 전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구출 이후의 삶이 남아 있다는 점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그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충분히 듣지 않는다. 스스로 고르는 삶보다 요원으로서 맡은 자리가 먼저 보인다. 자기 이야기를 펼칠 시간도, 관객이 그 마음을 따라갈 틈도 부족하다.

이 불만은 모든 인물에게 같은 분량을 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옐레나가 중심인물인 영화에서 모두의 과거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분량이 짧다는 것과 한 사람의 다음 삶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은 다르다.

태스크마스터를 다루는 방식은 후자에 가깝다. 영화가 그를 통해 다른 인물들의 위험을 알리는 일에 더 서두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그 사람이 이야기에서 맡은 용도부터 읽힌다.

그래서 나는 이 대목을 단순히 좋아하는 인물이 덜 나왔다는 아쉬움으로 넘기지 못한다. 발렌티나가 사람을 쓸모로 계산하는 태도를 비판했다면, 영화도 그 계산을 경계해야 한다. 중심인물의 절박함을 키우기 위해 다른 인물의 삶을 줄이는 선택은 특히 그렇다.

옐레나에게 건넨 관심이 진심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진심이 태스크마스터에게 닿지 않은 이유는 따져야 한다. 이 차이는 한 인물의 아쉬움인가, 아니면 영화가 내세운 약속의 빈틈인가?

함께 서지만 같은 몫을 받지는 못한다

옐레나와 밥을 향한 진심은 확실하다. 하지만 영화는 고스트와 버키까지 같은 깊이로 돌보지는 못한다.

고스트는 시설에서 살아남아 임시 팀에 합류하는 요원이다. 영화는 그가 위험 앞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보여준다. 정작 무엇을 바라고 누구를 믿게 되는지는 충분히 들려주지 않는다.

함께 싸웠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고용주에게 버림받았어도 그 일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다르다. 고스트에게는 그 차이를 드러낼 시간이 부족하다.

버키의 빈자리도 비슷하다. 발렌티나를 추적하던 하원의원이 현장에 합류하니 팀에는 든든한 중심이 생긴다. 그러나 팀이 얻은 도움에 비해 버키 자신이 얻은 변화는 작다.

그가 합류해서 무엇을 해결하는지는 알겠다. 이 사람들과 엮이며 자기 삶을 어떻게 다시 생각하는지는 덜 알겠다. 팀의 행동을 돕는 역할이 자기 이야기를 대신한다.

이 차이는 옐레나와 밥 옆에서 더 커진다. 두 사람에게는 능력으로 감출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을 보여줄 시간이 있다. 관객은 무엇을 해낼지뿐 아니라 어떻게 버틸지도 걱정한다.

고스트와 버키에게도 긴 독백이 필요했다는 뜻은 아니다. 임무가 끝난 뒤 무엇을 원하는지 잠깐 드러내도 사람은 달리 보인다. 영화는 두 사람에게 그런 관심을 충분히 나눠 주지 않는다.

함께 살자고 모인 팀이다. 분량은 별도다.

내가 보기엔 127분 안에서 옐레나와 밥에게 집중한 선택이다. 둘의 외로움을 따라가도록 중심을 잡은 덕분에 감정은 선명해졌다. 나는 그 집중 자체를 잘못이라고 보지 않는다.

모두에게 같은 시간을 줄 필요는 없다. 다만 짧게 등장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마음이 있다는 흔적은 남겨야 한다. 필요한 능력을 보탰다는 설명만으로 그 몫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특히 사람을 소모품으로 삼지 말자는 영화라면 더 그렇다. 옐레나와 밥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 솜씨가 있으니 아쉬움도 구체적이다. 다른 팀원의 다음 삶에는 왜 같은 질문을 덜 던졌는가.

그렇다고 이 빈틈 때문에 두 사람에게 건넨 다정함까지 가짜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옐레나와 밥의 이야기에 더 큰 점수를 준다. 다만 다른 팀원을 덜 돌본 대목까지 감싸지는 않겠다.

나는 이 팀의 손을 들어준다

《썬더볼츠*》는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사람도 버리지 말자고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약속을 모든 인물에게 지키지는 않는다. 나는 옐레나와 밥에게 건넨 관심을 믿으며, 다른 팀원에게 덜 돌아간 관심도 감점한다.

퓨와 풀먼은 강한 능력 뒤에 숨은 지친 사람을 끝까지 붙잡는다. 따라가기 쉬운 액션과 고통의 성격에 맞춘 해결 방식도 좋다. 다만 태스크마스터를 서둘러 소모하고 고스트와 버키의 다음 삶을 덜 물은 대가는 분명하다.

그래도 이 영화에는 127분을 쓸 가치가 있다. 강한 영웅의 승리보다 지친 사람이 다시 누군가를 믿는 과정이 궁금하다면 추천한다. 사람을 걱정하면서도 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팀 액션을 원하는 관객에게도 맞는다.

반대로 모든 팀원의 사연과 변화가 비슷한 무게로 펼쳐지길 기대하면 아쉽다. 특히 버키를 중심에 놓고 고르면 기대가 빗나간다. 그의 존재감은 크지만, 이 영화가 오래 들여다보는 마음은 옐레나와 밥의 것이다.

볼 때는 옐레나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보다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는지 따라가면 좋다. 밥의 힘과 밥이라는 사람도 따로 보자. 힘이 커지는 순간과 사람이 괜찮아지는 순간을 구분하면 영화의 선택이 또렷해진다.

이어서 볼 작품으로는 《블랙 위도우》를 먼저 꼽는다. 무기에서 벗어나는 일과 그 뒤를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하기 좋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국가가 소모품으로 삼은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묻는 짝이다.

내 별점은 5점 만점에 3.5점이다. 모두를 끝까지 돌보지는 못했지만, 힘보다 사람이 먼저인 영웅 영화라서 나는 이 팀의 손을 들어준다. 다만 함께 살자는 말에서 빠진 사람들의 몫까지 없던 일로 하지는 않겠다.

★★★☆☆ (3.5/5) — 버리지 말자는 진심은 좋지만, 모두를 돌보지는 못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마블 전작을 안 봐도 썬더볼츠*를 이해할 수 있나요?

고용주에게 버림받은 요원들이 임시 팀을 만든다는 중심 이야기는 따라가기 쉽다. 다만 옐레나와 태스크마스터의 이전 삶을 알고 싶다면 《블랙 위도우》를 먼저 보는 편이 좋다.

썬더볼츠*는 실화인가요? 원작이 있나요?

실화가 아니라 마블 코믹스의 팀과 인물을 활용한 영화다. 특정 단행본 한 권을 그대로 옮긴 작품은 아니다. 원작 지식보다 인물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집중하면 충분하다.

버키가 주인공인 영화인가요?

버키는 팀의 행동을 돕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감정의 중심은 옐레나와 밥이다. 버키 개인의 깊은 변화나 긴 서사를 기대하면 아쉽다.

액션보다 우울한 이야기가 많은 영화인가요?

외로움과 공허함이 중심에 있지만, 육탄전과 차량 액션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강한 능력이 삶의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다. 계속 통쾌하게 적을 쓰러뜨리는 영화만 원한다면 취향과 다르다.

썬더볼츠*와 함께 볼 만한 영화는 무엇인가요?

《블랙 위도우》는 무기로 길러진 사람의 해방 이후를 비교하기 좋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소모품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같은 기준으로 이어 보기 좋다.

김지훈 기자
ALJIstory 편집장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진실을 파고드는 심층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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