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가 빙하 틈에 빠져 있다. 친구 티모는 그를 두고 간다. 죽으면 새 몸으로 만들면 된다는 태도다. 미키는 아직 살아 있다.
《미키 17》의 잔인함은 여기서 시작한다. 미키는 위험한 일을 맡고, 죽으면 새 몸으로 대체되는 노동자다. 그런데 친구는 그가 숨 쉬는 동안 벌써 다음 미키를 생각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웃음보다 한숨이 먼저 나왔다. 티모야, 친구를 구하랬지 새로 주문하랬니. 새 몸을 만드는 기술보다 무서운 것은 그 기술을 핑계로 친구를 버리는 태도다.
나는 《미키 17》이 복제인간의 신기함보다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는 버릇을 겨눌 때 가장 날카로운 영화라고 본다.
친구를 버리는 데 복제 기술이면 충분하다
빙하 틈의 도입부는 복제 기술이 친구를 구하지 않을 핑계가 되는 순간을 찌른다. 티모는 새 몸을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눈앞의 친구를 버린다.
둘은 함께 사업에 실패하고 지구를 떠난 사이다. 그런데 얼음 행성까지 함께 온 친구가 위험에 빠지자, 그 인연은 힘을 잃는다. 다음 미키가 생긴다는 편리함이 지금 미키를 구할 이유부터 지워 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문제와 살아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두는 문제는 다르다. 티모는 그 차이를 건너뛴다.
나는 이 짧은 도입이 긴 기술 설명보다 정확하다고 본다. 몸을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도, 친구를 두고 떠나는 선택이 잔인하다는 것은 안다. 영화는 먼 미래의 발명품보다 당장 알아들을 수 있는 배신을 먼저 내민다.
티모가 미키를 미워해서 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더 쓰리다. 친구를 해치겠다는 분노조차 필요하지 않다. 다시 만들면 된다는 생각 하나면 충분하다.
그래서 이 장면의 무심함은 큰 악당의 위협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해치려는 사람만 조심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친구도 나를 버릴 수 있다.
미키에게 남은 고통은 다음 몸을 만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새 미키가 일을 이어 간다고 해서, 빙하 틈에 갇힌 지금의 미키가 구조되는 것은 아니다. 티모의 계산에는 바로 그 사람이 빠져 있다.
이 도입은 관객에게도 불편한 자리를 준다. 죽어도 돌아오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을 반기기 전에, 그 죽음을 누가 편리하게 여기는지 묻는다. 반복되는 죽음을 구경거리로만 즐기기 어렵게 만드는 출발이다.
그 덕분에 미키의 직업도 다르게 읽힌다. 위험한 일을 맡는다는 말은 담담하지만, 그 일을 맡긴 사람들은 그의 죽음 뒤에도 일을 계속한다. 멈추는 것은 미키의 몸뿐이다.
영화가 먼저 보여준 것은 복제의 놀라움이 아니라 교체의 편리함이다. 그 편리함 속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지 우리는 이미 봤다. 그렇다면 같은 얼굴의 미키가 둘이 되어 마주할 때,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서로 다른 목숨으로 느끼게 할까?
패틴슨은 같은 얼굴에 다른 목숨을 넣는다
패틴슨과 애키의 연기는 몸을 다시 만드는 일과 사람을 존중하는 일을 갈라놓는다. 새 몸이 있다고 해서 지금 눈앞의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로버트 패틴슨은 버려졌던 미키 17과, 그가 죽은 줄 알고 출력된 18을 연기한다.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하면 얼굴보다 목소리와 몸의 긴장이 먼저 차이를 알린다.
17은 주눅 든 태도로 상대를 대한다. 18은 낮고 거친 목소리로 자기 몫을 요구한다. 같은 얼굴인데 한쪽은 물러서고, 다른 쪽은 밀어붙인다.
나는 같은 얼굴이 마주한 순간 웃음이 났다.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패틴슨은 분장으로 차이를 설명하는 대신, 상대 앞에서 몸을 어떻게 쓰는지로 두 사람을 나눈다.
인류 복제 기술의 위대한 진보가 도착했다. 방이 좁다.
그 충돌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순히 성격이 반대여서가 아니다. 둘 다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 명을 치우면 편해진다는 생각은 둘을 보고 있을수록 잔인해진다.
다만 같은 기억을 물려받은 두 사람의 성격이 왜 이렇게 다른지 설명은 얇다. 패틴슨은 그 빈칸을 없애지는 못해도, 두 사람을 따로 바라보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나오미 애키가 연기하는 나샤는 미키의 연인이자, 그를 실험 재료로 취급하는 권위에 맞서는 사람이다. 애정 어린 태도와 부당한 명령 앞의 분노가 붙어 있어 좋다. 미키를 사랑한다는 말이 그를 지키려는 행동과 떨어지지 않는다.
애키는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을 마냥 얌전하게 연기하지 않는다. 나샤의 분노는 미키에게 참으라고 향하지 않고, 그를 함부로 쓰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덕분에 보호받아야 할 사람에게 순종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스티븐 연의 티모가 친근한 얼굴로 친구를 버린다면, 애키의 나샤는 거칠게 맞서며 연인을 지킨다. 말투가 부드러운지보다 실제로 누구를 살리려 하는지가 중요해진다.
두 미키를 구별하는 패틴슨과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는 애키가 이 질문을 붙든다. 그런데 영화는 왜 이들에게 머물지 않고 외계 생물과 개척대 이야기로 나아가는가?
크리퍼 이야기는 딴길이 아니다
이야기가 너무 벌어진다는 비판에는 나도 일부 동의한다. 그래도 크리퍼 이야기는 사람을 버리는 논리를 끝까지 따라간 결과이지, 딴길이 아니다.
복제인간의 충돌에 연애와 독재자 이야기까지 끼어들면 두 미키에게 쓸 시간이 줄어든다. 나도 17과 18이 서로를 견디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같은 얼굴로 다른 목숨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 둘에게 욕심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두 미키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만이 영화의 질문을 깊게 만드는 방법은 아니다. 둘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를 다른 생명 앞에서도 따져야 한다. 크리퍼는 그 질문을 맡는다.
크리퍼는 개척대가 도착한 얼음 행성에 원래 살던 생물이다. 괴물처럼 보이는 이 생물이 빙하 틈에 빠진 17을 구한다. 친구 티모가 떠난 자리에서 낯선 생물이 미키를 살리는 것이다.
이 뒤집기는 말로 착하게 살자고 외치는 것보다 훨씬 정확하다. 티모는 미키와 함께 살아왔지만 그를 버린다. 크리퍼는 인간의 친구가 아니지만 눈앞의 목숨을 구한다.
그렇다면 무서운 생김새와 잔인한 행동은 따로 판단해야 한다. 영화는 크리퍼를 보여준 뒤 그 판단을 개척대 쪽으로 돌린다. 누가 낯설게 생겼는지가 아니라, 누가 남의 생명을 치워도 된다고 여기는지가 문제다.
개척대를 이끄는 마셜은 크리퍼를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 티모에게 미키가 다시 만들면 되는 몸이라면, 마셜에게 크리퍼는 개척을 위해 없애도 되는 생물이다. 이유는 달라도 상대의 목숨을 자기 편의에 맞춰 처리한다는 점은 같다.
인류의 위대한 새 출발을 선언한다. 원주민은 빼고.
그래서 나는 크리퍼로 향하는 이야기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두 미키와 개척대 사이를 오갈 때, 앞서 만든 긴장이 느슨해지는 순간은 아쉽다. 필요한 확장이지만, 이어 붙이는 솜씨까지 늘 정확하지는 않다.
미키에게는 새 몸이 있다는 이유를 대고, 크리퍼에게는 개척에 방해된다는 이유를 댄다. 어느 쪽도 버려지는 생명의 사정은 묻지 않는다. 미키를 함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은 그가 우주선에 타기 전부터 시작됐다.
우주로 갔지만 계약은 지구에서 시작됐다
나는 미키를 지식인보다 빚에 몰린 생활인으로 바꾼 선택이 좋다. 덕분에 위험한 계약을 맺은 책임을 그의 어리석음에만 떠넘길 수 없어진다.
미키는 친구 티모와 마카롱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한다.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그에게 지구를 떠나는 우주선은 도망칠 기회다. 죽으면 새 몸으로 대체되는 일자리는 그 기회에 붙은 조건이다.
물론 지원한 사람은 미키다. 하지만 그가 지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계약이 공정해지지는 않는다. 사채업자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에게 선택지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서명을 받았다고 그 절박함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키가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를 보면, 이 일은 용감한 도전과도 거리가 멀다. 더 나은 미래를 고르기 전에 눈앞의 위협부터 피해야 한다. 영화는 그 다급함을 출발점에 놓는다.
원작 《미키7》의 미키는 역사가인 지식인에 가깝다. 영화는 그 지적 배경보다 실패와 빚, 낮은 자존감을 앞세운다. 나는 이 변화가 미키를 낮추는 대신, 그를 함부로 쓰기 쉬워진 사정을 드러낸다고 본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는 것은 쉽다. 그가 거절하지 않았다는 이유까지 붙이면 시키는 쪽의 마음도 편하다. 미키의 주눅 든 태도는 그래서 성격을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키가 자신을 아껴야만 존중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기 목숨의 값을 낮게 매겨도, 남들이 그 가격을 받아 적어서는 안 된다. 영화는 그 차이를 미키의 반복되는 죽음으로 드러낸다.
《기생충》과 나란히 놓으면 이 선택이 더 또렷하다. 두 영화에서 가난한 사람은 필요한 일을 해내는 동안 자리를 얻는다. 그 사람의 사정보다 맡은 기능이 먼저 계산된다.
《기생충》이 생계를 위한 일자리 경쟁을 다룬다면, 《미키 17》은 몸 자체를 교체하게 만든다. 다른 일손을 구하는 단계마저 건너뛴 것이다. 같은 일을 이어 갈 몸이 나오니, 지금 일하는 사람을 지킬 필요가 사라진다.
이렇게 보면 우주선에 오른 뒤 갑자기 잔인한 세상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구에서 빚진 사람을 몰아붙이던 태도가 얼음 행성에서는 죽어도 되는 노동자를 만든다. 평범한 생활에서 시작한 이 잔인함을, 마셜이라는 거대한 악당은 충분히 이어받는가?
악당이 커질수록 평범한 잔인함이 가려진다
마셜의 우스꽝스러움은 통쾌하지만, 티모의 무심함보다 덜 날카롭다. 악당이 너무 요란해지면 사람을 함부로 쓰는 버릇도 특별한 악인의 문제로 좁아진다.
마크 러팔로는 과장된 말투와 권위적인 몸짓으로 지도자의 허세를 드러낸다. 마셜이 권위를 내세울수록 그 권위를 진지하게 받아줄 마음은 사라진다. 권력자를 두려움 없이 비웃게 만드는 힘은 분명하다.
크리퍼를 제거 대상으로 취급하는 대목에서도 그 효과는 빠르다. 마셜은 다른 생명의 사정보다 자신의 개척 계획을 앞세운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과 실제 행동 사이의 거리를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나는 이 노골적인 표현이 영화의 질문을 조금 편하게 만든다고 본다. 저렇게 유별난 사람만 생명을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하면, 관객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 악당을 비웃는 동안 자신의 무심함은 따지지 않아도 된다.
티모가 더 불편했던 이유는 바로 그 거리가 짧아서다. 그는 거창한 명분을 외치지 않고도 친구를 버린다. 새 몸이 나온다는 편리한 사실 하나를 붙잡고, 지금 고통받는 미키에게서 떠난다.
티모와 마셜은 규모가 다른 선택을 하지만 같은 질문 앞에 선다. 내게 편리하다는 이유로 남의 목숨을 치워도 되는가. 티모의 장면에서는 그 질문이 친구 사이의 일로 다가온다.
마셜에게서는 대답이 너무 빨리 끝난다. 그의 허세와 폭력을 거부하면 관객은 곧바로 옳은 편에 설 수 있다. 반면 티모를 보고 나면 무심한 선택도 얼마나 잔인한지 오래 따지게 된다.
문제는 러팔로가 역할을 못 해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큰 연기가 악당의 표식을 너무 선명하게 붙인다. 영화가 겨눈 평범한 생명 경시가 마셜의 요란함 뒤로 밀리는 것이 아쉽다.
나는 후반에도 도입부의 불편함을 더 느끼고 싶었다. 죽으면 다시 만들면 된다는 말은 큰 악당의 입에서만 나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근한 친구도 그 말을 믿으면 눈앞의 사람을 버린다.
그렇다고 마셜의 과장이 앞서 쌓은 성과를 지우지는 않는다. 마셜보다 티모가 더 무섭다는 내 판결은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 불편한 친구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이유를 만든다.
다시 만들 수 있어도 버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내 별점은 5점 만점에 3.5점이다. 이야기가 넓어지며 힘이 빠져도, 살아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나는 도입부의 잔인함은 끝까지 남는다. 복제 기술이 신기해서가 아니다. 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눈앞의 목숨을 무시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얼굴은 마셜보다 티모였다. 요란한 지도자는 악당이라고 밀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친구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그렇게 멀리 밀어낼 수 없다.
빙하 틈의 도입과 패틴슨의 두 미키가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는 잔인함을 정확히 붙잡는다. 다만 마셜의 큰 풍자와 넓어지는 이야기가 그 정확함을 흐려 감점했다. 두 미키에게 조금 더 머물렀다면, 같은 얼굴 아래 서로 다른 목숨이 있다는 사실도 더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죽음을 두고 웃다가 그 웃음이 불편해지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추천한다. 패틴슨이 목소리와 몸의 긴장만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 연기도 시간을 들일 이유다. 반대로 복제 기술의 원리나 두 미키의 관계만 촘촘하게 따라가길 원한다면 권하지 않는다.
볼 때는 누가 진짜 미키인지보다 누가 미키를 함부로 대하는지 따라가면 좋다. 티모는 다음 몸을 생각하고, 나샤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을 지킨다. 그 차이를 기억하면 크리퍼가 미키를 구하는 행동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이어서 볼 작품은 《기생충》이다. 가난한 사람을 필요한 일손으로만 보는 태도가 그 영화에서는 생계 경쟁을 만든다. 여기서는 일손을 구하는 수고마저 생략하고 몸을 새로 뽑는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과장을 아쉬워하면서도 그 질문에는 끝까지 동의한다. 미키를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지금의 미키를 버려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미키 17》은 어떤 영화인가요?
봉준호 감독의 137분 SF 영화다. 죽으면 새 몸으로 대체되는 노동자 미키를 통해, 사람을 소모품으로 대하는 태도를 비튼다. 죽음과 착취를 웃음으로 다루므로 가벼운 우주 모험을 기대하면 어긋난다.
원작 《미키7》과 무엇이 다른가요?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을 바탕으로 했다. 원작의 미키가 역사가인 지식인에 가깝다면, 영화는 사업 실패와 빚, 낮은 자존감을 앞세운다. 위험한 계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생활인의 사정에 무게를 둔다.
로버트 패틴슨의 1인 2역은 볼 만한가요?
이 영화를 추천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 중 하나다. 주눅 든 17과 낮고 거친 목소리의 18을 몸의 긴장까지 달리해 구분한다.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할 때 상대에게 물러서는지 밀어붙이는지 보면 차이가 바로 드러난다.
복제인간 설정을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나요?
미리 공부할 필요는 없다. 위험한 일을 맡고 죽으면 새 몸으로 대체되는 노동자라는 조건만 알면 된다. 다만 복제의 과학적 원리나 두 미키의 성격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영화는 아니다.
함께 보면 좋은 봉준호 영화는 무엇인가요?
《기생충》을 추천한다. 두 작품 모두 가난한 사람을 필요한 일을 수행하는 일손으로만 보는 태도를 겨눈다.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몸의 교체로까지 이어지는 차이를 비교하면 《미키 17》의 질문이 또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