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조직의 부하 오즈가 후계자 알베르토와 마주한다. 알베르토가 그를 조롱한다. 오즈는 충동적으로 그를 죽인다. 뒷수습은 이제부터다.
《더 펭귄》은 이 살인으로 주인공의 속부터 드러낸다. 오즈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일을 견디지 못한다. 자기 기분을 지키려고 사람을 죽였는데, 이제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말을 꾸며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남자를 금세 미워하지 못했다. 홍수로 가족을 잃은 소년 빅터를 곁에 두는 모습에는 다정함이 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낯설지 않아서, 그의 다음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바로 그 응원이 이 드라마가 파놓은 함정이다. 나는 오즈가 가족을 말할 때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얻는지 따져보게 됐다. 《더 펭귄》은 가족을 원하는 악당을 응원하게 만든 뒤, 그가 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람을 마음대로 부릴 권리였다고 판결한다.
오즈는 가족보다 자기 자리를 원한다
나는 첫 살인에서 오즈의 가족 사랑에도 순서가 있다는 단서를 읽었다. 남을 지키는 일보다 자신이 인정받는 일이 먼저다. 알베르토의 조롱 앞에서 그 순서가 그대로 튀어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치밀하게 자리를 빼앗지 않았다는 점이다. 살인이 먼저이고 계산은 나중이다. 자존심이 상한 순간에는 앞으로 감당할 위험조차 뒷전으로 밀린다.
오즈 씨, 승진 면담을 살인으로 끝내면 인사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충동을 보여준 다음에 그의 말솜씨를 펼치는 순서가 좋다. 팔코네와 마로니는 고담의 권력을 다투는 범죄 조직이다. 오즈는 그 사이를 오가며 거짓말로 자기 자리를 만든다.
그러니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는 어렵다. 말이 진실을 전하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그 말 뒤에 누가 이익을 얻는지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오즈의 다정함을 전부 연기라고 지워버리면 이야기는 시시해진다. 빅터는 홍수로 가족을 잃은 열일곱 살 소년이다. 그에게 곁을 내주는 오즈의 모습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온기가 있다.
나는 그 온기까지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마음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마음보다 앞서는 욕심이 무엇이냐다. 오즈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 관계에서 자기 자리를 양보하려 하지는 않는다.
빅터에게는 소속감이 생기고, 오즈에게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생긴다. 겉으로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보호하는 사람과 보호받는 사람 사이에는 처음부터 힘의 차이가 있다.
빅터가 오즈를 믿는다고 해서 두 사람이 동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 깊어질수록 오즈의 판단을 거절하기는 어려워진다. 나는 둘의 가까워지는 모습을 반기다가도 그 차이 때문에 마음이 걸렸다.
이 드라마는 그 불편함을 서둘러 해소하지 않는다. 다정한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무시당하자 사람부터 죽였던 첫 선택을 잊지 못하게 한다. 덕분에 가족이라는 말은 오즈를 용서할 이유가 아니라 따져야 할 약속이 된다.
그렇다면 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한 또 다른 인물, 소피아도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리를 찾을까?
소피아의 과거가 오즈의 말을 의심하게 한다
4화는 가족이라는 말이 보호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소피아의 과거를 보고 나면, 오즈가 내미는 가족이라는 약속도 다르게 들린다.
소피아 팔코네는 오빠 알베르토의 죽음을 추적하며 오즈와 맞서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오즈의 거짓말을 들춰낼 위험한 경쟁자로 다가온다. 오즈를 따라 이야기를 보던 나는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그의 위기부터 걱정했다.
4화는 바로 그 시선을 붙잡아 돌린다. 소피아는 아버지의 범죄를 뒤집어쓰고 아캄에 갇혔던 딸이다. 아캄은 고담의 수용·치료 시설이지만, 그녀에게는 보호보다 폭력을 겪은 장소다.
그녀를 이해하려면 먼저 가족이 무슨 짓을 했는지 봐야 한다. 지켜줘야 할 아버지가 딸에게 죄를 떠넘겼다. 가족의 안전이 아니라 가족 안에서 힘을 쥔 사람의 안전이 먼저였던 셈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소피아를 경계하던 마음을 거뒀다. 앞서 느낀 위협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나는 소피아를 가둔 가족의 설명을 믿고 그녀부터 의심했다. 그 사실이 불편했다.
이 전환이 좋은 이유는 소피아에게 동정만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를 이해하는 일과 이후의 선택을 모두 허락하는 일은 다르다. 드라마는 그녀를 무조건 편들라고 하지 않고, 판단할 자리를 제대로 마련한다.
그 자리에서 보면 팔코네라는 성도 자랑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소피아가 어머니의 성인 지간테를 택하는 선택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자신을 버린 가족의 이름부터 버려야 자기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여기서 오즈와 소피아의 차이가 또렷해진다. 오즈는 가족을 원한다고 말하며 사람을 자기 곁으로 끌어들인다. 소피아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갇혔던 사람으로서 그 이름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나는 오즈의 다정한 말도 더 까다롭게 듣게 됐다. 누군가를 가족으로 삼는다는 약속에는 상대가 떠날 자유도 들어 있어야 한다. 소피아의 과거는 그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 무엇을 겪는지 보여준다.
오즈가 빅터에게 주는 소속감도 이제 마냥 반갑지는 않다. 곁에 둘 자격을 누가 정하는지, 관계를 끝낼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지 묻게 된다.
이렇게 달라진 판단을 긴 설명보다 먼저 납득시키는 것은 배우들의 얼굴이다.
배우들은 다정함을 가장 위험하게 만든다
파렐과 밀리오티는 인물의 상처를 보여주되, 그 상처로 폭력을 용서받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두 사람 덕분에 오즈와 소피아를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선택까지 편들지는 않게 됐다.
오즈를 맡은 콜린 파렐의 힘은 두꺼운 분장 너머에 있다. 빅터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일 때, 그의 다정함은 경계를 풀고 싶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말투에 묻어나서 나도 잠시 그를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친근함에는 상대를 자기 곁에 붙들려는 욕심도 섞여 있다. 빅터와 가까워지는 대목에서 파렐은 보호자와 지배자를 따로 연기하지 않는다. 같은 다정함이 소년에게는 위안이 되고, 오즈에게는 충성을 얻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나는 파렐이 무서운 얼굴을 할 때보다 친절할 때 더 신경이 쓰였다. 빅터가 마음을 열수록 오즈에게서 멀어지기는 어려워진다. 배우는 그 불편한 차이를 지우지 않은 채 둘의 관계를 따뜻하게 만든다.
소피아를 맡은 크리스틴 밀리오티는 4화에서 불안과 공격성을 함께 드러낸다. 아캄의 과거를 겪는 얼굴에는 상처가 있고, 그 상처가 곧 순한 표정으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덕분에 나는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다음 행동을 걱정했다.
밀리오티는 소피아를 불쌍한 딸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위협적인 태도 속에서도 겁먹은 사람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그 두 감정이 함께 있으니, 가족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현재의 싸움까지 밀고 온다는 사실을 납득하게 된다.
빅터 역의 렌지 펠리즈는 강한 척하기보다 누군가를 믿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그가 경계를 풀 때마다 나도 오즈를 보호자로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어머니 프랜시스 역의 디어드리 오코널은 가족사를 두고 아들과 충돌하며, 오즈의 효심에 섞인 분노까지 끌어낸다.
오즈 씨, 가족 채용 공고에 충성 의무만 있고 보호 조항이 없습니다.
오즈가 가족을 말할 때, 나는 이제 그 말을 듣는 빅터의 얼굴부터 본다. 말하는 오즈만 보면 따뜻하지만, 믿는 빅터와 맞서는 소피아까지 보면 불편하다. 그런데 이 위험한 가족 이야기는 익숙한 마피아 공식의 반복에 불과할까?
익숙한 범죄극이라는 비판은 절반만 맞다
조직끼리 속이고 배신하는 이야기가 익숙하다는 비판은 맞다. 하지만 나는 그 익숙함만으로, 오즈를 응원한 내 마음까지 따지게 만드는 힘을 깎지는 않겠다.
팔코네와 마로니 사이를 오가는 오즈의 거짓말에는 새로움이 적다. 위기를 넘기려고 말을 바꾸고, 힘센 쪽을 이용해 자기 몫을 키운다. 범죄극을 즐겨 봤다면 다음에도 배신이 기다리리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조직의 승패만 따라가면 이 드라마는 손해를 본다. 누가 누구를 속였는지 따지는 재미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오즈를 오래 기억하기는 어렵다. 내가 더 신경 쓴 것은 그가 빅터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였다.
빅터가 곁에서 소속감을 얻을 때면 나도 오즈의 성공을 조금은 바라게 된다. 소년에게 기댈 곳이 생겼으니, 그곳이 당장 무너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드라마는 바로 그 바람을 이용해 오즈에게 시간을 벌어준다.
그를 좋아할 이유가 생겼다고 해서 믿을 근거까지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보는 동안에는 둘을 자꾸 혼동한다. 나는 빅터가 안심하는 모습을 보고, 오즈의 앞선 선택을 잠시 뒤로 미뤘다.
《소프라노스》와 나란히 놓을 지점도 여기다. 가족을 아끼는 범죄자는 잔혹하기만 한 범죄자보다 쉽게 마음을 얻는다. 두 작품 모두 그 친근함을 받아들이는 일과 행동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건드린다.
다만 《소프라노스》가 긴 일상 속에서 그 불편함을 쌓는다면, 《더 펭귄》은 여덟 회의 권력 다툼에 집중한다. 오즈가 올라갈수록 가족이라는 말이 누구에게 이익을 주는지 더 급하게 따져야 한다. 익숙한 조직 싸움도 그 질문 앞에서는 그냥 지나칠 배경이 아니다.
《더 배트맨》과 비교하면 따라가는 인물이 바뀐 효과가 뚜렷하다. 영화에서 주변에 있던 오즈가 여기서는 자기 사정을 길게 말한다. 영웅의 수사 곁에서 보던 범죄자를 가까이 따라가자, 그의 변명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이 변화가 단순히 악당의 비중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고 본다. 오즈의 말을 오래 듣게 한 뒤, 그 말과 행동이 정말 맞는지 관객에게 되묻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즈 개인을 꿰뚫는 이 시선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는 고담 전체를 설명할 때도 날카로운가?
사람의 욕심은 깊게 파지만 도시는 덜 판다
오즈가 왜 사람을 붙잡으려 하는지는 끝까지 드러난다. 하지만 고담 사람들이 왜 그를 따르는지는 그만큼 깊게 풀지 못한다.
홍수는 도시를 무너뜨렸고, 범죄 두목 카르미네 팔코네의 죽음은 권력의 빈자리를 만들었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보호자를 찾는 상황은 이해된다. 빅터가 오즈에게 기대는 과정은 그 절박함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문제는 한 소년의 믿음과 여러 사람의 지지가 같은 설명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빅터에게는 잃어버린 가족이 있고, 오즈와 함께 보낸 시간이 있다. 그가 경계를 푸는 이유는 관계 안에서 차곡차곡 쌓인다.
반면 도시의 다른 사람들이 오즈에게 기대를 거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빠르다. 그의 말이 먹힐 조건은 마련했지만, 그 말을 믿기로 한 사람들의 사정은 충분히 따라가지 않는다. 오즈에게 인정이 왜 절실한지는 알겠는데, 사람들에게 왜 하필 오즈여야 하는지는 덜 선명하다.
오즈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과정은 빅터와의 관계만큼 설득력 있지 않다. 왜 따르는지 납득해야, 그가 내세우는 보호 약속도 더 무섭게 들린다. 버림받은 도시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피해를 겪었다고 모두 같은 약속에 마음을 주지는 않는다.
이 차이는 가족이라는 말을 따질 때도 중요하다. 빅터에게 그 말은 곁에 머물 이유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는 무엇을 보장하는가. 드라마가 그 차이를 더 붙들었다면 오즈의 지배욕도 더 넓은 자리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다만 도시를 덜 설명했다고 해서 오즈를 향한 판결까지 흐려지지는 않는다. 마지막까지 보면, 그가 사랑을 말할 때 지키려는 것이 상대의 삶인지 자기 만족인지 분명해진다. 다정한 말의 진심보다 그 말 뒤에 남는 선택이 더 정확하다.
가족을 위한다는 말도 보험 약관처럼 예외 조항부터 읽어야 한다.
오즈는 자신이 원하는 관계만 예외로 남겨두려 한다. 이것은 사랑이 없다는 설명보다 더 불편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상대를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고 믿으면, 그 마음은 보호를 보장하지 못한다.
도시를 설명하는 힘의 부족을 감안해도, 악당에게 준 내 호감을 되묻게 하는 이 여덟 회에는 시간을 쓸 가치가 있다.
가족을 원한 게 아니라 주인이 되고 싶었다
《더 펭귄》은 오즈를 이해하게 만들지만, 그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구분을 끝까지 지킨 점을 높이 산다. 불쌍한 사정과 다정한 말이 있어도, 상대의 삶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는 생기지 않는다.
오즈가 원하는 것은 가족의 사랑보다 가족 안에서 자기 자리를 보장받는 일이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따뜻하지만, 그 사람의 바람까지 존중하지는 않는다. 드라마는 그의 성공을 따라가면서 그 차이를 끝내 덮어주지 않는다.
파렐과 밀리오티의 연기, 소피아를 다시 판단하게 만드는 4화가 높은 평가의 이유다. 다만 익숙한 조직 간 배신과, 사람들이 오즈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단순하게 처리한 점은 감점한다.
범죄자의 승리보다 그를 응원한 자기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권한다. 가족 사이에서 애정과 통제가 어떻게 뒤섞이는지 궁금한 사람에게도 맞는다. 반대로 배트맨의 활약이나 통쾌한 응징을 기다린다면 다른 작품을 고르는 편이 낫다.
잔혹한 폭력과 거듭되는 배신을 견디기 힘든 사람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오즈와 가까이 지내는 시간을 충분히 요구한다. 그래야 그의 친절을 반겼던 마음까지 제대로 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볼 때는 오즈가 가족을 말한 뒤, 상대가 실제로 무엇을 얻는지 보라. 4화에서는 소피아를 처음 경계했던 이유가 누구의 설명에서 왔는지 떠올리면 좋다. 반전을 맞히는 일보다 자신이 누구를 믿었는지 되짚는 쪽이 더 재미있다.
이어서 《더 배트맨》을 보면, 영웅의 수사 곁에서 보던 오즈와 그의 변명을 따라가며 보는 오즈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할 수 있다. 《소프라노스》는 범죄자의 가족 사랑을 이해하는 일과 그의 행동을 용서하는 일을 더 오래 구별하게 만든다.
나는 오즈를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그의 가족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 별점은 5점 만점에 4점이다. 빅터와 가까워지는 오즈를 보며 나도 경계를 풀었다. 4화는 소피아를 의심했던 내 판단부터 돌아보게 했다. 도시 사람들이 오즈를 따르는 이유까지 이만큼 꼼꼼히 보여줬다면 더 높은 점수를 줬을 것이다.
자주 묻는 질문 (FAQ)
《더 배트맨》을 먼저 봐야 하나요?
먼저 보면 홍수 이후의 고담과 오즈의 처지를 이해하기 쉽다. 다만 《더 펭귄》은 오즈와 소피아의 권력 다툼만으로도 따라갈 수 있는 범죄극이다.
배트맨의 활약을 기대해도 되나요?
배트맨의 활약을 보려는 목적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영웅의 수사보다 범죄자들이 사람을 끌어들이고 권력을 얻는 과정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몇 부작이며 시청 부담은 어느 정도인가요?
총 8부작이며 회당 47~68분이다. 조직 사이의 거짓말만 따라가기보다 오즈와 빅터의 관계 변화를 함께 보는 편이 좋다.
실화인가요? 특정 원작 만화를 옮겼나요?
실화가 아니라 DC 코믹스 캐릭터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다. 특정 만화 한 권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으며, 영화 《더 배트맨》에서 이어지는 작품이다.
잔인한 장면이 많은가요?
살인과 조직 간 폭력뿐 아니라 가족 안의 억압도 다룬다. 다정한 관계가 위협으로 바뀌는 과정까지 오래 지켜봐야 하므로, 정서적으로 잔혹한 이야기에 약하다면 피하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