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사평

가여운 것들(2023) 리뷰: 제 삶은 되찾았지만 남의 자유는 놓쳤다

LUX · 2026년 11월 07일

세상을 배우는 벨라가 춤을 춘다. 여행 상대인 덩컨도 함께 춘다. 벨라는 자기 식으로 움직인다. 덩컨은 그 움직임을 붙잡으려 든다.

《가여운 것들》의 이 장면에서 나는 웃음이 터졌다. 함께 즐기자던 남자가 상대의 몸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하니 우스울 수밖에. 덩컨 씨, 같이 추자고 했지 조종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벨라는 과학자 고드윈의 실험으로 다시 살아나 세상을 배우는 여성이다. 몸은 성인이지만, 처음에는 걷는 일도 말하는 일도 서툴다. 벨라가 자기 방식으로 춤추자, 덩컨이 허락한 자유의 한계도 드러난다.

덩컨에게 자유로운 여자란 자기 곁에서 자기 뜻대로 자유로운 여자다. 이 춤이 영화 전체를 말해 주는 이유다. 나는 이 영화가 벨라에게 자기 삶을 돌려주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하지만 남의 지배에서 벗어난 벨라가 남을 지배할 때는 너무 쉽게 박수를 친다.

춤을 같이 춘다고 몸의 주인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춤이 벨라의 자유와 덩컨의 소유욕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려 드는지, 두 사람의 움직임만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벨라에게 춤은 자기 몸으로 즐기는 일이다. 남이 기대하는 모양에 맞추기보다, 자기가 느끼는 대로 움직인다. 덩컨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 움직임을 허락받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덩컨은 바로 그 지점에서 벨라와 어긋난다. 그녀의 거침없음에 끌리면서도, 그 거침없음이 자기 뜻을 벗어나면 붙잡으려 한다. 좋아했던 성질을 가까워진 뒤에는 고치려 드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벨라가 춤을 잘 추느냐가 아니다. 덩컨의 동작을 제대로 따라 하느냐도 아니다. 자기 몸을 어떻게 움직일지 정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함께 춘다는 말에는 상대에게 반응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하지만 반응하는 일과 복종하는 일은 다르다. 영화는 그 차이를 설명하는 대신, 같은 자리에 선 두 몸이 충돌하게 한다.

그래서 이 장면의 웃음은 벨라의 서툶을 놀리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를 주도한다고 믿던 덩컨의 당황이 우습다. 벨라가 자기 식으로 움직일수록, 그의 자신감에 붙어 있던 조건이 드러난다.

나는 이 선택을 높이 산다. 벨라를 그저 억압받는 사람으로 세워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즐거움을 찾고 있고, 덩컨은 그 즐거움을 자기 뜻에 맞추느라 바쁘다.

둘의 차이는 작지만 결정적이다. 벨라는 자기 몸을 움직이려 하고, 덩컨은 벨라의 몸까지 움직이려 한다. 같은 춤을 추어도 두 사람이 원하는 자유의 범위는 같지 않다.

다만 덩컨의 우스운 꼴만 보고 끝내면 이 장면의 절반을 놓친다. 상대를 아낀다는 마음도 그 사람을 대신 결정할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 벨라를 돌보는 다른 남자들 역시 이 기준을 피해 갈 수 없다.

영화는 이렇게 누가 친절한지보다 누가 결정하는지를 보게 만든다. 벨라에게 필요한 것은 더 너그러운 허락이 아니라, 허락 없이도 선택할 자리다. 그렇다면 벨라는 남자의 손을 벗어나는 데서 얼마나 더 멀리 가는가?

벨라는 몸만 자유로워지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엠마 스톤의 몸과 말이 벨라의 성장을 설득한다고 본다. 그 변화 덕분에 자유는 성적 경험을 넘어, 세상을 배우고 판단하는 힘으로 넓어진다.

초반의 벨라는 비틀거리며 걷고, 말도 뚝뚝 끊는다. 몸을 움직이는 일과 생각을 말로 옮기는 일이 모두 서툴다. 스톤은 그 서툶을 귀여운 표정 하나로 때우지 않는다.

여행하며 경험을 쌓을수록 걸음과 말이 차츰 안정된다. 관객은 누가 성장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달라진 벨라를 알아본다. 처음에는 몸이 앞서 나갔다면, 이제는 자기 생각으로 행동을 고르기 시작한다.

그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빈곤을 목격하는 대목에 있다. 자기 욕구를 발견하던 벨라가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반응한다. 즐거운 것을 더 달라는 요구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세상이 들어온다.

나는 여기서 벨라를 응원할 이유가 더 커졌다. 자기 몸을 되찾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남에게도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 때문이다. 남을 지배하지 않는 자유로 나아갈 가능성도 이때 열린다.

남성 상대역인 마크 러팔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벨라와 여행하는 덩컨은 처음의 자신만만한 유혹자에서 질투하고 징징대는 남자로 무너진다. 벨라의 말이 침착해질수록 그의 목소리와 몸짓은 요란해진다.

러팔로의 과장은 그래서 정확하다. 단순히 우스운 남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통제하지 못할 때 무너지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자기 뜻을 설명하는 대신 소란을 키우는 모습이 덩컨의 한계를 드러낸다.

자유연애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듯한 남자의 이상은 원대하다. 자기 허락 안에서만.

윌렘 대포는 벨라를 만든 고드윈의 흉터투성이 얼굴에 돌보는 태도를 겹친다. 그 다정함 때문에 오히려 애정과 통제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 드러난다.

벨라의 관찰자이자 구혼자인 맥스를 맡은 라미 유세프는 듣고 기다린다. 다만 그 절제가 두 사람의 출발부터 동등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 배우들이 잘한 것은 누가 착한 사람인지 먼저 판정하지 않는 일이다. 대신 벨라가 자기 말을 얻을 때 곁의 남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배우가 성장을 설득했다고 해서, 그 성장의 출발점까지 정당해지는가?

수치심이 없다고 동의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남성의 성적 판타지로만 보는 데는 반대한다. 그러나 미성숙한 벨라의 동의를 가볍게 넘겼다는 비판에는 동의한다.

벨라는 성인의 몸에 어린아이 같은 말과 행동을 지닌 채 출발한다. 그런 벨라와 성인 남성들이 성적 관계를 맺는다. 몸이 성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이해하는 힘까지 성인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나눠 물어야 한다. 벨라는 자기 욕구를 부끄러워하는가. 그리고 자기가 들어가는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는가.

첫 질문에 아니라고 답해도 두 번째 질문은 남는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태도와 자기 선택의 결과를 아는 힘은 다르다. 영화는 앞의 태도를 신나게 펼치지만, 뒤의 힘은 충분히 따지지 않는다.

인류가 쌓은 수치심을 모두 벗겨도 남는 질문이 있다. 제대로 이해했나.

벨라가 즐거워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질문을 지우면 곤란하다. 상대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벨라보다 세상을 많이 아는 남자들의 몫을 그녀의 호기심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벨라를 남자들이 보고 싶은 여성으로만 만든 영화라는 판결도 좁다. 벨라는 성적 경험을 마친 뒤에도 계속 배운다. 독서하고, 일하고, 빈곤을 만나면서 자기 즐거움 밖의 문제를 받아들인다.

성적 경험이 벨라를 설명하는 전부였다면 이 배움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넘어 무엇을 판단하는지까지 따라간다. 나는 그 차이를 작게 취급하고 싶지 않다.

특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배우는 과정은 중요하다. 자기 욕구가 소중하다는 발견에서 남의 삶도 소중하다는 발견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벨라가 남을 지배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랄 근거도 여기 있다.

그래서 내 비판은 벨라의 호기심을 억누르자는 말이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존중하되, 충분히 알 기회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택을 존중한다면서 이해할 조건을 묻지 않으면 자유라는 말만 편해진다.

나는 벨라의 이후 성장이 앞선 관계의 문제를 자동으로 씻어준다고 보지 않는다. 잘 자랐다는 결과가 출발부터 공평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벨라의 경험을 앞세운 선택은 그녀의 목소리를 얼마나 살렸고, 무엇을 덜 묻게 했는가?

벨라의 눈을 얻고 남자의 말을 의심하는 힘은 줄었다

영화는 벨라가 남의 설명 대신 자기 경험으로 판단하는 과정을 앞세운다. 대신 그녀의 삶을 설명하는 남자의 말을 의심할 장치는 원작보다 약해졌다.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원작 소설에서는 남편의 기록과 여성의 반박이 충돌한다. 한쪽 설명을 읽었다고 그 삶을 다 안다고 믿을 수 없다. 누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벨라의 삶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의 삶을 지배하는 방법은 몸을 붙잡는 일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신 설명하고, 그 설명을 사실로 굳히는 일도 포함된다. 여성의 반박은 바로 그 권한을 흔든다.

영화는 다른 길을 택한다. 기록끼리 다투게 하기보다 벨라가 겪는 세계를 우리 앞에 펼친다. 나는 이 선택을 원작을 얼마나 그대로 옮겼느냐로 재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벨라의 삶을 누구의 설명으로 받아들이느냐다. 영화 속 벨라는 남자의 기록에 갇히는 대신 직접 움직이고 경험한다. 관객도 그녀가 무엇을 배웠는지 말과 걸음의 변화로 판단한다.

집에서 여행지로 나가며 흑백이 풍부한 색채로 바뀌는 선택은 특히 좋다. 벨라에게 세상이 넓어지는 순간을 화면도 함께 겪는다. 자유롭다는 대사를 보태지 않아도 달라진 배움의 크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 색채는 벨라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집 안에서 관찰받던 사람이 밖으로 나가 직접 관찰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이 자리의 변화가 화려한 도시 자체보다 더 반갑다.

다만 경험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과 그 설명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은 다르다. 영화는 벨라 가까이 우리를 데려가지만, 원작처럼 말하는 사람의 권한을 거듭 흔들지는 않는다. 얻은 힘이 분명한 만큼 줄어든 의심도 분명하다.

같은 감독의 《더 페이버릿》에서는 성적 관계가 궁정의 지위 경쟁에 묶인다. 누구를 원하는지가 누구 위에 설 것인지와 떨어지지 않는다. 《가여운 것들》은 벨라에게 그 관계의 규칙 자체를 거절할 여지를 더 크게 준다.

그래서 나는 벨라의 독립을 더 멀리까지 묻게 된다. 남이 정한 자리를 떠나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는 자신이 남에게 정해 주는 자리도 따져야 한다.

자기 삶을 말할 권리를 얻은 벨라는 다른 사람의 몸 앞에서도 같은 원칙을 지키는가?

자유의 승리라고 부르기엔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여기부터는 구체적인 반전을 밝히지 않지만 결말의 선택을 다룬다. 결말 이야기를 피하고 싶다면 다음 총평으로 건너뛰길 바란다. 나는 영화가 마지막 응징을 축하하느라 벨라의 지배는 제대로 따지지 않았다고 본다. 남의 뜻에서 벗어난 사람이 남의 몸을 결정할 때, 영화의 질문은 느슨해진다.

구체적인 처벌 방식은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 응징에는 벨라를 만든 고드윈의 실험 권력과 닮은 점이 있다. 타인의 몸에 개입할 권한을 결정하는 사람이 결국 자신이라는 점이다.

물론 벨라의 저항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를 다시 지배하려는 사람에게 순순히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저항할 권리와 상대의 몸을 마음대로 바꿀 권리는 같지 않다. 앞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뒤의 권리까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이 둘 사이에서 충분히 멈춰 서지 않는다.

내가 아쉬운 것은 응징이 있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식이다. 상대의 지배욕을 이미 보았기에, 관객은 벨라의 선택을 통쾌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그 순간 같은 행동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고드윈에게 물었던 질문을 벨라에게도 물어야 한다. 아끼거나 미워한다는 감정이 타인의 몸을 결정할 자격을 주는가. 벨라를 응원한다는 이유로 이 질문만 거두면 앞선 비판도 힘을 잃는다.

그렇다고 마지막 선택 하나가 벨라의 성장을 모두 지우지는 않는다. 그녀는 배움을 이어가고, 자기 진로와 관계를 정하는 사람이 된다. 처음의 관찰 대상이 자기 삶의 방향을 고르는 데 이른 성취는 크다.

나는 특히 배움이 계속된다는 점을 높이 산다. 자유가 원하는 쾌락을 얻는 순간에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며 살지 스스로 정하는 벨라에게는 분명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마지막의 생략이 더 아쉽다.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던 벨라라면, 자신의 응징도 돌아볼 힘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 힘을 더 보여주기보다 승리의 기분을 지키는 쪽을 택한다.

내가 원한 것은 벨라를 다시 얌전하게 만드는 결말이 아니다. 그녀가 얻은 선택권을 남에게도 인정하는지 끝까지 묻는 결말이다.

제 삶을 되찾은 승리, 남의 자유까지 지킨 승리는 아니다

나는 《가여운 것들》에 박수를 보낸다. 벨라는 남이 관찰하고 설명하던 대상에서 자기 삶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다만 영화는 그녀를 지배에서 풀어준 뒤, 그녀가 행사하는 지배 앞에서는 질문을 느슨하게 만든다.

엠마 스톤은 걸음과 말의 변화로 배움을 쌓는다. 마크 러팔로는 그 배움 앞에서 무너지는 소유욕을 정확하게 웃긴다. 벨라의 세계와 함께 넓어지는 색채까지, 이 성장을 눈으로 납득하게 만드는 힘이 크다.

내 별점은 5점 만점에 4점이다. 몸과 말, 색채로 벨라의 성장을 끝까지 보여준 솜씨에 높은 점수를 준다. 그러나 미성숙한 벨라가 관계를 충분히 이해했는지 덜 묻는다. 마지막 응징에서도 남의 몸을 결정하는 권력을 충분히 따지지 않아 만점은 주지 않는다.

기괴한 판타지 속에서 한 사람이 자기 판단을 얻는 과정을 좋아한다면, 나는 이 141분을 권한다. 스톤이 침착해질수록 러팔로가 요란해지는 변화만 따라가도 관계의 역전이 또렷하다. 집의 흑백이 여행지의 색채로 바뀌는 흐름도 그 배움과 함께 읽으면 좋다.

반대로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인물과 성인의 성적 관계가 크게 불편하다면 권하지 않는다. 노골적인 성적 표현도 피하지 않는 영화다. 여성의 해방을 빈틈없는 모범답안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도 맞지 않는다.

이어서 볼 작품은 《더 페이버릿》이다. 그 영화에서는 욕망이 지위 경쟁에 묶이고, 벨라는 관계의 규칙 자체를 거절하려 한다. 나란히 보면 관계에서 이기는 일과 지배를 벗어나는 일이 다르다는 점이 선명해진다.

나는 벨라가 제 삶을 되찾는 데 박수를 친다. 다만 자유의 증거는 남의 삶을 쥐었을 때도 필요하다.

★★★★☆ (4/5) — 제 삶은 되찾았지만 남의 자유까지 지키지는 못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가여운 것들》은 실화인가요?

실화가 아니라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판타지다. 불가능한 과학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세계이므로, 의학적 개연성보다 벨라가 선택권을 얻는 과정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원작 소설을 읽고 봐야 하나요?

먼저 읽을 필요는 없다. 영화는 벨라의 경험을 따라가는 이야기로 독립해 있다. 원작에서는 남편의 기록과 여성의 반박이 충돌하므로, 영화를 본 뒤 읽으면 누가 벨라의 삶을 설명하는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성적 표현이 많은 영화인가요?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반복된다. 특히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벨라와 성인 남성들의 관계가 중요한 불편을 만든다. 이런 설정에 민감하다면 화려한 화면이나 희극적인 분위기만 기대하고 고르지 않는 편이 좋다.

141분 동안 무엇에 집중하면 더 재미있나요?

벨라의 걸음과 말이 안정되는 동안 덩컨의 행동은 얼마나 요란해지는지 비교해 보라. 두 배우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면서 관계의 힘도 뒤집힌다. 흑백에서 풍부한 색채로 넓어지는 화면도 벨라의 배움과 연결된다.

《가여운 것들》 다음에는 어떤 영화를 보면 좋나요?

같은 감독의 《더 페이버릿》을 권한다. 그 작품에서는 성적 관계와 지위 경쟁이 얽히고, 《가여운 것들》에서는 벨라가 관계의 규칙을 거절하려 한다. 욕망을 이루는 일과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기 좋다.

김지훈 기자
ALJIstory 편집장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진실을 파고드는 심층 비평

Facebook X (Twitter) 링크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