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알게 된 뒤에도 애거사의 잘못을 물을 수 있을까? 나는 물어야 한다고 본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그 당연한 대답을 자꾸 망설이게 만든다. 누군가를 이해하면 그 사람 편을 들고 싶어진다. 이 드라마는 그 마음을 아주 능숙하게 건드린다.
《완다비전》의 수상한 이웃이었던 애거사는 이제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완다의 주문에서 풀려난 그녀는 잃어버린 힘을 되찾으려 마녀들을 모은다. 목적지는 시험을 통과하면 원하는 것을 준다는 ‘마녀의 길’이다. 하지만 함께 걷는다고 서로를 믿는 사이는 아니다. 회사라면 협업 교육부터 받아야 할 팀이다.
나는 이 불편한 동행이 좋았다. 마녀들은 시험을 치르며 저마다 피하고 싶었던 상처를 마주한다. 캐스린 한은 그 틈에서도 애거사의 비웃음을 거두지 않는다. 소년을 향한 애착이 드러나도 안심은 안 된다. 사연을 들려준다고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인물에게 마음이 가는 내 쪽도 편하지 않다.
문제는 그렇게 생긴 애정을 마지막에 어디까지 허용하느냐다. 상처를 보여주는 데 쓴 정성만큼 피해를 돌아보는 데도 시간을 써야 한다. 나는 이 드라마가 애거사의 상처를 이해시키는 데는 성공했다고 본다. 하지만 여행에서 생긴 피해는 끝까지 따지지 않는다.
상처를 안다고 무죄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애거사의 사연을 들려주면서도 그녀를 선인으로 바꾸지 않는 선택을 높이 산다. 아픈 과거는 지금의 행동을 설명하지만, 그 행동을 옳게 만들지는 않는다.
애거사는 남을 구하려고 길에 나선 사람이 아니다. 잃어버린 자기 힘을 되찾으려고 동료를 모은다. 이 출발점을 기억하면 그녀의 다정함에도 쉽게 안심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에게 애착을 느끼는 일과 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일은 다르다. 애거사는 그 둘이 반드시 함께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년을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도, 앞서 드러낸 욕심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이런 주인공이 좋다. 속마음을 알았다는 이유로 경계심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아서다. 그녀를 더 이해하면서도 계속 의심하는 일이 이 이야기에서는 가능하다.
마녀의 길에 모인 동료들도 애거사의 사연을 듣기 위한 구경꾼이 아니다. 힘을 잃은 물약 전문가 젠에게는 자기 삶의 문제가 있다. 보호 마녀 앨리스는 어머니의 죽음에 붙들려 있다.
점술로 살아가는 릴리아 역시 자기 과거와 능력을 믿는 일이 쉽지 않다. 이들이 함께 시험을 치르면서, 애거사의 절박함만 중요하다는 생각은 설 자리를 잃는다. 모두가 무언가를 되찾으러 왔다.
그래서 시험의 재미는 누가 마법을 더 잘 쓰느냐에만 있지 않다. 한 사람의 두려움이 드러났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중요하다. 함께 빠져나가야 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믿기는 어렵다.
목적지가 같다고 이해관계까지 같아지는 건 아니다. 단체 예약은 됐는데 신뢰는 각자 지참이다.
이 불신은 여행을 방해하는 장식이 아니다. 애거사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할 때,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지켜보게 만든다. 그녀의 상처에 마음이 기울수록 그 옆에 선 사람들도 봐야 한다.
여기서 드라마는 중요한 선을 지킨다. 애거사에게 사랑할 마음이 있다는 사실과 그녀를 믿어도 된다는 판단을 묶지 않는다. 누군가를 아낀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가한 잘못까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사연만 깊어지고 동료들의 사정은 얕아지는 이야기였다면 나는 덜 좋아했을 것이다. 각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시험 덕분에 다른 마녀들의 절박함도 곁에 남는다. 애거사를 이해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잊지 않게 한다.
그런데 경계할 이유를 이렇게 분명히 보여주는 사람에게, 나는 왜 자꾸 마음이 가는가?
캐스린 한은 애거사를 착하게 만들지 않는다
캐스린 한은 애거사가 소년을 아낄 때도 상대를 밀어붙이는 버릇을 지우지 않는다. 나는 이 연기가 애거사를 이해하는 일과 용서하는 일을 갈라놓는다고 본다.
애거사를 맡은 캐스린 한은 초반 형사 흉내부터 일부러 뻣뻣하게 군다. 거친 태도와 과장된 몸짓은 자신이 형사라고 믿는 상태에 맞아떨어진다. 자연스럽지 않아서 오히려 갇힌 세계의 이상함을 드러내는 연기다.
중요한 건 주문에서 벗어난 뒤에도 그 과장이 몽땅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거사는 여전히 비웃음으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자기 쪽으로 대화를 끌고 간다. 형사라는 역할은 벗었어도 남을 휘두르려는 버릇은 남는다.
그러다 소년을 대할 때 애착이 새어 나온다. 한은 그 마음을 보여주면서도 앞서 드러낸 거친 태도와 끊어놓지 않는다. 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아끼고 이용할 수도 있다는 불편함이 살아 있다.
나는 이 차이가 좋다. 애거사에게 정이 붙는 까닭을 알겠는데, 그렇다고 곁에 선 사람에게 안심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의 연기는 관객에게 애정을 주면서 경계할 이유도 남긴다.
정체불명의 소년을 맡은 조 로크는 불안과 호기심으로 그 거친 태도를 받아낸다. 애거사를 따라가는 대화에서도 무조건 믿고 기대는 추종자로만 머물지 않는다. 더 알고 싶어 다가가면서도 의심을 거두지 않는 태도가 두 사람의 동행을 지탱한다.
한이 대화를 몰아붙일수록 로크의 불안은 더 중요해진다. 소년이 그저 감탄만 했다면 애거사의 위험함도 매력으로 포장됐을 것이다. 의심이 남아 있어서,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생겨도 힘의 차이를 잊지 않는다.
물약 전문가 젠을 연기한 사셰르 자마타는 냉소적인 말투로 이 여행에도 생활인의 불만이 있음을 붙잡는다.
보호 마녀 앨리스를 맡은 알리 안은 어머니의 음악과 만나는 4화에서도 지친 경계심을 놓지 않는다.
이 동료들이 자기 삶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나기에 애거사의 사연만 듣고 넘어가기 어렵다. 그녀가 무엇을 잃었는지 못지않게, 곁에 선 이들이 무엇을 잃을지도 걱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편한 관계를 지켜보는 재미 앞에서, 덜 웃기고 덜 무섭다는 비판은 얼마나 중요할까?
덜 무섭다는 비판은 맞지만 실패라는 판결은 틀리다
나는 웃음도 공포도 힘이 약한 순간이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한다. 그렇다고 위험한 관계를 지켜보는 재미까지 실패로 묶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초반의 형사물 흉내는 범인을 잡는 쾌감보다 애거사가 처한 상태를 드러낸다. 마녀들의 시험이 시작된 뒤에도 중요한 것은 무엇이 튀어나오느냐만이 아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가 계속 문제다.
물론 이런 선택이 밋밋한 순간까지 전부 구해주지는 않는다. 과장된 몸짓이 나왔다고 매번 웃음이 나지는 않는다. 위험을 내세운 시험에서도 인물들의 두려움만큼 내 쪽의 공포가 커지지는 않는다.
다만 모든 장면이 배꼽과 심장을 동시에 책임질 필요는 없다. 종합보험은 아니다.
내가 더 신경 쓰며 본 것은 애거사가 상대의 약점을 알아차리는 순간들이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안다는 건 위로할 기회를 얻는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더 정확하게 상처 줄 방법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그 불편함이 가장 잘 살아나는 관계가 애거사와 리오다. 리오는 애거사와 날카롭게 맞서는 인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치에는 낯선 적끼리라면 생기지 않을 친밀함이 남아 있다.
나는 이들이 맞서는 장면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더 강한지보다 서로를 얼마나 아는지가 더 위협적이어서다. 상대를 잘 아는 사람이 반드시 다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두 사람 사이에 버틴다.
이 관계의 좋은 점은 애거사의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그녀를 불쌍한 쪽에만 세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처받은 사람도 상대를 밀어붙인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남을 휘두를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를 강한 공포의 기준으로만 재고 싶지 않다. 놀라는 순간보다 가까워지고도 안심하지 못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애거사를 이해할수록 경계도 필요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기준에서 웃음과 공포는 관계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그 자체로 약한 대목은 아쉽지만, 인물 사이의 위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동료를 필요로 하는 마음과 동료를 아끼는 마음의 차이는 계속 남는다.
그렇다면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이 동행은 익숙한 마법 여행과 무엇이 다른가?
여행의 목적보다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나는 원하는 것을 찾는 여행을, 동료의 상처까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로 바꾼 점이 좋다. 자기 소원이 절박하다고 곁에 선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도 저마다 부족하다고 믿는 것을 찾으려 동료들이 길을 걷는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의 마녀들도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함께 움직인다. 다만 이들은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까지 챙겨 왔다.
이 차이 때문에 동료가 필요하다는 말의 뜻도 달라진다. 시험을 통과하려고 필요한 사람인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지 따져야 한다. 애거사가 일행을 모았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동료가 되지는 않는다.
젠에게는 되찾아야 할 힘이 있고, 앨리스에게는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의 죽음이 있다. 이들의 사정을 알수록 애거사의 목적만 응원하기 어려워진다. 누구의 소원이 더 절박한지 순위를 매길 수 없어서다.
나는 특히 앨리스의 과거가 어머니의 음악과 연결되는 대목을 이 기준으로 본다. 그 시험은 일행이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제만은 아니다. 한 사람이 오래 짊어진 두려움을 다른 사람들도 마주하는 시간이 된다.
여기서 동료의 상처를 아는 일은 분명한 부담을 만든다. 사정을 듣기 전처럼 그 사람을 자기 목적에만 쓸 수는 없다. 적어도 보는 나는 그렇게 쓰려는 행동을 더 날카롭게 따지게 된다.
《완다비전》과 비교할 때도 내 기준은 같다. 완다의 슬픔을 이해하는 일과 그 마법에 휘말린 사람들의 피해를 인정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슬픔이 크다고 다른 사람의 삶이 작아지지는 않는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그 문제를 함께 걷는 동료들 사이로 가져온다. 마법을 쓰는 사람의 사연뿐 아니라, 그 곁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의 사정도 보여준다. 그래서 힘을 되찾겠다는 목표보다 그 과정에서 누구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애거사에게 마음이 가는 순간에도 동료들의 사정은 곁에 남는다. 나는 이것이 여행의 재미를 줄이기는커녕 더한다고 본다. 원하는 것을 얻는 장면만 기다릴 때보다, 그 선택으로 누가 다칠지 더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료들의 상처를 이렇게 잘 보여준 드라마는 마지막에도 그 무게를 충분히 지켰는가?
끝에서 피해보다 다음 여행을 서두른다
나는 마지막에 다음 목표를 향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진다고 본다. 그만큼 여행에서 생긴 피해를 따질 시간은 줄어든다.
후반부에는 앞선 시험을 돌아보게 하는 사실이 드러난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일을 겪은 동료들에게 누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드라마가 이 질문을 아예 피하는 것은 아니다. 인물들도 벌어진 일의 무게를 마주한다. 하지만 곧 새로운 목적이 앞에 놓이면서, 책임을 따지는 시간보다 앞으로 움직이는 힘이 커진다.
내가 아쉬운 것은 처벌 장면이 없어서가 아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고 피해가 저절로 다뤄지는 것도 아니다. 남은 사람이 무엇을 기억하고 짊어질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앞선 시험들은 동료마다 자기 삶이 있다는 사실을 공들여 보여줬다. 젠의 잃어버린 힘도, 앨리스가 붙들린 과거도 애거사의 목적만큼 절박했다. 그러니 여행이 끝날 때도 그들의 사정은 같은 무게로 남아야 한다.
그런데 마무리는 다음에 무엇을 찾으러 갈지에 더 큰 자리를 내준다. 나는 그 방향 전환이 너무 빠르다고 느꼈다. 함께 걸었던 이들의 고통이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계기로만 남을 위험이 있어서다.
인물이 자기 상처를 인정하는 장면과 남에게 준 상처를 감당하는 장면은 다르다. 전자는 그 사람을 이해하게 한다. 후자는 그 이해를 어디까지 허락할지 따지게 한다.
애거사의 사연을 더 알게 됐다는 이유로 두 번째 질문을 줄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녀에게 정이 붙었기 때문에 더 오래 물어야 한다. 좋아하는 인물에게만 계산을 느슨하게 하면, 동료들의 고통부터 값이 내려간다.
다음 여행을 남겨두는 선택 자체는 싫지 않다. 위험한 두 사람이 다시 동행한다는 약속에는 분명 끌리는 힘이 있다. 다만 그 기대가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이 드라마는 애거사를 착한 사람으로 바꾸지 않는 데는 끝까지 신중하다. 나는 피해를 돌아보는 시간에도 그 신중함을 더 써주길 바랐다. 악인을 악인으로 남기는 것만으로 책임을 충분히 물은 것은 아니다.
이제 내 판결에 남은 것은 그 짧은 마무리가 앞서 쌓은 인물들의 힘을 얼마나 깎았느냐다.
여기서 모든 피해를 애거사 혼자 저질렀다는 말은 아니다. 후반의 반전은 다른 인물에게도 책임을 묻게 한다. 내가 따지는 것은 책임자의 이름을 밝혔느냐가 아니라, 그 뒤에 동료들의 피해를 돌아볼 시간을 충분히 줬느냐다.
총평: 이해했다고 책임까지 덜어줄 수는 없다
나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상처받은 악인을 이해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다만 여행에서 생긴 피해를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서둘러 마무리했다. 사연을 들은 뒤에도 잘못을 물어야 한다는 내 기준에서, 마지막은 분명 짧다.
캐스린 한은 비웃음과 애착을 함께 살려 애거사를 믿기 어려운 주인공으로 남긴다. 동료들의 상처를 건드리는 시험도 그녀만 응원하지 못하게 만든다. 내 별점은 5점 만점에 3.5점이다. 비웃음과 애착이 공존하는 연기는 좋지만, 피해보다 다음 여정을 서두른 끝맺음은 아쉽다.
그래도 나는 이 불편한 일행과 보낸 9부작이 아깝지 않았다.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왜 정이 드는지 따지는 독자라면 시간을 쓸 가치가 있다. 서로 의심하는 동료들의 대화와 과장된 마녀극을 좋아한다면 더 잘 맞는다.
반대로 강한 공포나 쉼 없는 폭소를 기대한다면 권하지 않는다. 잘못의 대가를 마지막에 분명히 정리하는 이야기를 원한다면 아쉬움도 크다. 이 작품의 장점은 판결의 시원함이 아니라, 좋아하면서도 경계하게 만드는 인물에게 있다.
초반 형사 흉내의 어색함은 실수로 넘기지 않는 편이 좋다. 그때의 애거사와 소년에게 애착을 드러낼 때의 애거사를 나란히 보면 한의 연기가 더 재미있다. 시험에서는 정답보다 각 마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따라가길 권한다.
이어서 볼 작품은 《완다비전》이다. 슬픔을 이해하는 일과 타인에게 준 피해를 용서하는 일이 같은지 비교하기 좋다. 《오즈의 마법사》와 함께 보면, 원하는 것을 찾는 여행에 동료가 왜 필요한지도 다르게 읽힌다.
나는 애거사를 더 이해하게 됐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긴 피해까지 덜어줄 생각은 없다.
자주 묻는 질문 (FAQ)
《완다비전》을 먼저 봐야 하나요?
먼저 보는 편을 권한다. 애거사가 완다의 주문에 갇힌 이유와 전작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면 출발이 훨씬 쉽다. 두 작품이 슬픔과 타인에게 준 피해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비교할 수 있다.
몇 부작이고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총 9부작이며 디즈니+ 작품이다. 초반 형사물 흉내에서 마녀들의 시험으로 형식이 바뀐다. 첫 분위기만 보고 끝까지 형사극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무서운 드라마인가요?
강한 공포가 중심인 드라마는 아니다. 과장된 마녀극과 서로 믿지 못하는 인물들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놀라는 장면보다 가까운 사람이 위험할 때 생기는 긴장을 즐기는 취향에 맞는다.
실화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인가요?
실화도 특정 소설의 각색도 아니다. 마블 코믹스 인물을 활용해 《완다비전》 이후의 애거사를 중심으로 만든 이야기다. 코믹스 지식보다 전작의 인물 관계를 알고 보는 쪽이 도움이 된다.
결말까지 볼 가치가 있나요?
나는 있다고 본다. 후반부에는 앞선 시험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피해의 책임을 충분히 따지기보다 다음 여정을 서두르는 마무리는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