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한 제지 기술자 범모가 있다. 재취업 경쟁자 만수가 그와 엉킨다. 범모의 아내 아라도 총기 소동에 휘말린다. 일자리 이야기였는데 사람이 다칠 판이다.
《어쩔수가없다》의 ‘고추잠자리’ 대목에서 나는 웃음이 터졌다. 만수는 절박한데, 상황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채용 절차에 총기 사용이 들어가면, 지원 자격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웃고 나니 범모가 걸린다. 그 역시 일자리를 잃은 기술자이고, 만수처럼 무너진 생활을 견디는 사람이다. 만수는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서 경쟁자라는 조건만 골라낸다.
나는 이 영화가 가족을 지키려는 남자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을 가족 사랑이라고 부르는 남자를 정확히 겨눈다고 본다.
총까지 꺼냈는데 취업 이야기다
문제는 재취업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취업을 위해서라면 남을 해쳐도 된다는 쪽으로 바뀌는 그의 판단이다.
제지 기술자 만수는 해고 뒤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한다. 오래 해온 일을 다시 하고 싶다는 바람까지는 나도 이해한다. 문제는 그 바람을 이루려고 가짜 구인 광고로 경쟁자를 찾는 데서 시작한다.
보통 구인 광고는 일할 사람을 찾는다. 만수의 광고는 일하면 안 될 사람을 찾는다.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반가운 동료가 아니라 없애야 할 상대가 되는 것이다.
범모와 엉키는 대목은 그 뒤집힌 판단을 몸으로 보여준다. 만수의 계획 안에서는 경쟁자 한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범모에게는 아내도 있고 무너진 생활도 있다. 사람을 조건 몇 개로 줄여놓았던 계획이 사람들 사이에서 엉킨다.
여기에 아라까지 끼어들면서 만수는 상황을 뜻대로 다루지 못한다. 나는 이 어긋남이 좋다. 만수가 혼자 세운 명분보다 그가 건드린 타인의 삶이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수가 매끈하게 일을 처리했다면 관객은 성공 여부부터 따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동은 그가 얼마나 서툰지를 보게 한다. 누군가를 해치겠다는 결심과 그것을 감당할 능력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 서투름이 살인의 무게를 줄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기 생활을 되찾겠다며 타인의 생활에 뛰어든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낸다. 본인이 당황한다고 해서 그 앞의 사람이 덜 위험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장면의 웃음은 만수를 응원하는 웃음으로 편하게 굳지 않는다. 우스운 행동을 보고 있다가도 총이 있는 상황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화는 그의 초조함을 가까이 보여주면서 그 초조함에 면허를 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가족이라는 말도 다시 따져야 한다. 가족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남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결정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만수는 앞의 마음으로 뒤의 결정을 설명하려 든다.
나는 영화가 그 거리를 지우지 않는다는 점을 높이 산다. 해고당한 사람의 절박함은 충분히 전해지지만, 총 앞에 놓인 범모의 처지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수에게는 정말 가족을 지킬 다른 방법이 없었나?
다른 길은 아내가 이미 걷고 있다
미리와 시조는 만수가 거부한 길을 이미 걷고 있다. 두 사람의 생활을 보면, 만수는 생존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데 매달린다.
미리는 만수의 아내다. 남편이 실직하자 생활을 줄이고 직접 일한다. 이전처럼 살 수 없다면 사는 방식을 바꾸겠다는 태도다.
나는 이 선택이 만수의 어떤 설명보다 힘이 세다고 느꼈다. 미리는 가족을 책임진다는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달라진 형편에 맞춰 자신이 할 일을 바꾼다.
만수에게는 바로 그 변화가 어렵다. 가족에게 필요한 돈을 버는 일과 제지 기술자로 돌아가는 일을 떼어놓지 못한다. 오래 해온 일을 잃은 상처가 다른 길을 거부할 이유까지 되지는 않는다.
또 다른 경쟁자인 시조는 다른 일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다. 원하는 직업을 잃었다고 아버지 역할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시조의 생활은 그 사실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다.
물론 직업을 바꾸는 일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숙련공에게 일자리는 월급이 들어오는 곳만이 아니다. 쌓아온 기술을 더는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도 나는 가볍게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픈 것과 옳은 것은 다르다. 미리와 시조 역시 형편이 달라진 대가를 치른다. 만수만 그 대가를 남에게 넘길 권리는 없다.
만수 씨,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방법은 하기 싫으신 거죠.
영화는 그가 놓기 싫어하는 생활도 정성껏 들려준다. 집을 둘러싼 바람과 대나무 잎, 새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지키고 싶은 집이라는 말이 그제야 손에 잡힌다.
이 소리들이 좋은 이유는 만수의 욕심을 낯설게 만들지 않아서다. 익숙하고 편안한 집을 잃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나도 그 생활을 아까워하면서 만수의 불안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다고 집을 지키는 일이 가족을 지키는 일과 늘 같지는 않다. 미리는 생활을 줄여서라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만수는 이전 생활을 되찾아야만 가족을 책임졌다고 믿는다.
아내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데, 남편은 바뀐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영화는 두 사람을 나란히 놓는 것만으로 만수의 설명을 흔든다. 이렇게 명분이 허술한 사람을 우리는 왜 계속 따라가게 되는가?
이병헌은 변명을 진심으로 믿게 한다
배우들은 가족 사랑과 자리 욕심의 차이를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기 행동이 옳다고 믿는 태도로 그 틈을 드러낸다.
이병헌이 연기하는 만수는 관객을 웃기려 들지 않는다. 범모를 둘러싼 총기 소동에서도 본인은 당장 자기 계획이 급하다.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과 끝내 목적을 이루려는 절박함이 맞붙는다.
나는 이 진지함이 만수를 더 우습고 위험하게 만든다고 본다. 어수룩하게 굴면서도 남을 해치려는 목적은 놓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이 서툴다고 마음까지 순한 사람은 아니다.
이병헌은 그 둘을 편하게 갈라놓지 않는다. 당황하는 만수를 따라가다 보면 잠깐 그의 실패를 걱정하게 된다. 그러다 그가 성공한다는 말이 누구에게는 재앙이라는 사실에 걸려 멈춘다.
이 연기가 탁월한 이유는 바로 거기다. 만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붙잡으면서도 범죄를 용서할 구실은 내주지 않는다. 그가 자기 변명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사실과 그 변명이 옳다는 판단은 끝내 별개다.
손예진이 연기하는 미리는 생활을 줄이고 직접 일하는 대목에서 단단해진다. 거창한 결심을 내세우기보다 달라진 형편에 맞춰 움직이는 몸짓이 앞선다. 가족을 책임지는 사람이 남편 하나뿐이라는 생각부터 무너진다.
나는 이 담담함이 만수의 절박함에 맞서는 힘이라고 느꼈다. 미리까지 남편의 불안에만 매달렸다면 가족의 사정은 만수의 설명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손예진은 미리에게 실제로 생활을 바꾸는 사람의 무게를 준다.
그래서 두 배우를 함께 볼 때는 누가 더 가족을 사랑하는지 점수를 매길 필요가 없다. 한 사람은 달라진 생활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이전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그 행동의 차이만으로 충분하다.
이성민의 범모는 총기 소동의 우스꽝스러움 아래 비참함을 남겨, 만수가 버리려는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
박희순의 선출은 만수가 원하는 자리를 가진 관리자의 태도로, 그가 탐내는 삶을 보여준다.
이들 사이에서 만수는 불쌍한 가장이라는 설명만으로 남지 않는다. 자신과 닮은 사람은 밀어내고 부러운 사람의 자리는 원한다. 하지만 만수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과 감싸는 것은 다르다.
불쌍하다고 무죄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가족을 위한 살인을 허락한다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웃음이 피해자의 고통을 잠시 밀어내는 위험은 분명히 있다.
만수의 실직을 안타까워하는 것과 그의 범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영화는 그 차이를 미리와 시조의 생활로 보여준다. 둘 다 만수에게 훈계하지 않지만, 다른 길이 없다는 그의 설명을 무너뜨린다.
그 길이 편해서가 아니라, 달라진 형편에서도 가족의 생활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수에게만 모든 길이 막힌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은 길을 선택지에서 빼버린다. 그러고 나면 원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일만 가족을 위한 행동으로 남는다.
가족을 위한다는 사유서는 제출됐지만, 살인 허가증은 발급되지 않았다.
이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만수의 불안이 낯설지 않아서다. 해오던 일을 잃고 자신이 쓸모없어졌다고 느끼는 마음은 이해된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했다고 남의 삶을 빼앗는 결정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다.
오히려 범모는 만수의 절박함을 변호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도 실직한 기술자이고, 자존심과 생활이 함께 무너졌다. 만수의 고통이 범죄의 이유라면 범모의 고통도 같은 무게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총기 소동에서는 이 당연한 기준이 잠깐 흔들린다. 상황이 어떻게 꼬일지 따라가다 보면 범모가 겪는 위협보다 소동의 우스운 모양에 먼저 반응한다. 나 역시 웃고 나서야 그가 처한 위험을 다시 의식했다.
나는 그 웃음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웃음 덕분에 만수의 행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웃고 난 뒤 누구의 처지로 돌아오느냐다.
만수가 곤란해졌다는 사실만 남는다면 피해자는 그의 취업 과정에 생긴 장애물이 된다. 범모 역시 지킬 생활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남아야 만수의 설명을 제대로 따질 수 있다.
그래서 내 판단은 만수에게 얼마나 마음이 쓰였는지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가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돌려주는지까지 보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의 웃음은 끝까지 만수의 변명을 벗겨내는 데 성공하는가?
변명은 벗겼지만 고통을 붙드는 힘은 고르지 않다
영화는 만수의 변명을 정확히 벗긴다. 다만 위험과 우스꽝스러움을 오갈 때, 그에게 위협받는 사람의 고통을 오래 붙잡지는 못한다.
‘고추잠자리’ 대목은 그 엇갈림이 잘 맞아떨어진 장면이다. 상황은 우스운데 총이 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웃는 동안에도 누군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당하리라는 불안이 함께 움직인다.
여기서 웃음은 만수의 명분을 깎는다. 가족을 지키겠다는 큰말과 눈앞의 소동을 감당하지 못하는 행동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거리를 설명하는 대신 직접 겪게 한다.
다만 웃음이 멎은 뒤에도 피해자의 사정이 또렷하게 남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상황이 어떻게 꼬일지 궁금해질수록, 범모가 잃은 생활보다 만수의 계획에 생긴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온다. 나는 이때 영화의 재주가 영화의 질문을 잠깐 앞선다고 느꼈다.
범모를 불쌍하게 만드는 시간을 더 달라는 뜻은 아니다. 그에게도 만수만큼 절실한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오래 붙들고 싶었다. 소동이 재미있게 굴러갈수록 그 바람은 뒤로 밀린다.
만수의 자리 욕심을 알아보는 일과 피해자의 처지를 느끼는 일은 다르다. 전자는 또렷하지만 후자는 때때로 짧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판단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판단이 가슴을 누르는 힘에는 아쉬움이 있다.
비교해서 볼 작품은 코스타가브라스의 《액스》다. 두 영화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같은 소설에서 출발한다. 일자리를 얻으려고 경쟁자를 죽인다는 설정을 놓고, 주인공의 사정을 어디까지 받아들이게 하는지 나란히 따져보기 좋다.
《어쩔수가없다》에서 내가 붙잡은 기준은 미리의 생활이다. 만수가 가족을 내세울 때마다, 아내가 실제로 무엇을 바꾸고 감당하는지를 보면 된다. 그러면 경쟁자를 없애는 일이 가족에게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는 설명은 버티기 어렵다.
가족의 반응을 비중 있게 다룬 선택도 그래서 좋다. 만수 혼자 자기 행동에 이름을 붙이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한다는 주장은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 앞에서도 검증받아야 한다.
아쉬움은 있지만, 나는 만수의 변명을 따지는 이 불편한 웃음에 표를 주겠다.
가족을 지킨다는 말로 자기 자리를 지켰다
나는 《어쩔수가없다》에 139분을 쓸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실직한 남자를 위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가 내세운 가족 사랑의 속을 끝까지 따지기 때문이다. 만수가 되찾으려는 것은 가족의 생활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기 몫이라고 믿었던 자리다.
이병헌의 절박한 어수룩함은 만수를 이해하게 하면서도 용서할 구실은 주지 않는다. 손예진의 미리는 생활을 바꾸는 행동으로 남편에게 다른 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두 연기가 만수의 설명을 서로 다른 쪽에서 흔드는 힘이 크다.
다만 웃음과 위험을 오가는 동안 피해자의 고통을 붙드는 힘은 고르지 않다. 만수의 계획이 꼬이는 재미가 그에게 위협받는 사람의 사정을 앞서는 순간을 감점했다. 그래서 내 평가는 5점 만점에 4점이다.
주인공의 불안에는 공감하되 그의 변명까지 받아주지는 않는 범죄극을 좋아한다면 추천한다. 반대로 범인의 성공을 응원하며 시원하게 달리고 싶다면 맞지 않는다. 피해자의 고통을 무겁게 유지하는 영화를 원하는 관객에게도 이 웃음은 거슬릴 것이다.
볼 때는 만수가 가족을 내세울 때마다 미리가 실제로 바꾸는 생활을 함께 보라. 경쟁자들도 악당으로 묶기보다 만수가 두려워하거나 탐내는 삶으로 보면 좋다. 그러면 웃음이 누구를 겨누는지 더 또렷해진다.
이어서 볼 작품은 같은 소설에서 출발한 《액스》다. 일자리를 위한 범죄라는 같은 설정에서, 주인공의 사정을 어디까지 받아들이게 하는지 비교하기 좋다. 나는 만수의 실직에는 마음이 아팠고, 그가 붙인 ‘가족을 위해서’라는 설명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자주 묻는 질문 (FAQ)
《어쩔수가없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실화가 아니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The Ax》를 원작으로 한다. 해고된 기술자가 재취업 경쟁자를 제거하려 한다는 극단적인 설정으로, 익숙한 실직의 불안을 따진다.
《액스》를 먼저 봐야 이해할 수 있나요?
먼저 볼 필요 없다. 《액스》(2005)는 같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별개의 작품이다. 《어쩔수가없다》를 본 뒤, 두 영화가 주인공의 범죄에 얼마나 공감하게 만드는지 비교하면 좋다.
무서운 영화인가요, 웃긴 영화인가요?
실직과 죽음을 웃기게 보여주다가 그 웃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블랙코미디이자 범죄 스릴러다. 총기와 폭력이 얽힌 위험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터진다. 가볍고 편안한 코미디를 기대하면 맞지 않는다.
러닝타임은 얼마이고 어떤 취향에 맞나요?
139분이다. 주인공을 이해하면서도 그의 행동에는 반대하게 만드는 범죄극을 좋아한다면 추천한다. 빠른 사건 해결이나 통쾌한 범죄 성공담을 원한다면 길게 느껴질 것이다.
스포일러 없이 알고 가면 좋은 점은 무엇인가요?
만수가 가족을 위한다고 말할 때 아내 미리가 실제로 무엇을 바꾸는지 함께 보라. 경쟁자들에게도 지켜야 할 생활이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으면 좋다. 만수의 절박함과 그의 선택이 옳은지는 따로 판단해야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