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 얇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향한 이 비판은 딸 윌라의 속마음이 적다는 말이지, 그가 구출만 기다린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앞의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뒤의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맡은 밥은 과거를 숨긴 채 딸을 키워온 아버지다. 한때 혁명조직에서 활동했지만, 지금은 불안에 붙들려 딸을 통제한다. 위험이 닥치자 그는 목욕가운 차림으로 허둥대며 달린다.
나는 그 몸을 보며 웃다가도 금세 조마조마해졌다. 딸을 지키겠다는 마음은 절박한데, 몸이 영 따라주지 않는다. 그런데 체이스 인피니티가 연기하는 윌라도 따로 탈출을 이어간다. 아버지가 자기를 찾으러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딸을 구하는 아버지보다, 딸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그릴 때 가장 강하다.
딸이 얇다는 비판은 절반만 맞다
윌라에게 속마음을 말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맞다. 하지만 마음을 적게 들려주는 인물과, 남이 구해주기만 기다리는 인물은 다르다.
나는 이 차이를 윌라가 움직이는 방식에서 찾는다. 영화는 밥이 딸을 찾아 나서는 동안, 딸에게도 별도의 탈출을 맡긴다. 아버지가 움직여야만 딸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이 아니다.
밥은 과거에 자신을 쫓던 군인 록조 때문에 다시 도망쳐야 한다. 윌라에게는 자신이 고르지 않은 부모의 과거가 지금의 생활을 덮치는 사건이다. 같은 위협을 받아도 두 사람이 감당하는 문제는 다르다.
밥은 예전에 혁명조직 프렌치 75에서 활동했다. 윌라의 어머니 퍼피디아도 그 조직의 일원이었다. 딸은 그들의 선택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선택이 남긴 위험을 피해야 한다.
그러니 아버지가 딸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만으로 이야기를 끝내면 곤란하다. 부모가 시작한 일 때문에 쫓기는데, 딸은 보호에 감사만 해야 하는가. 윌라가 통제를 답답해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밥의 불안도 이해한다. 과거를 숨기며 딸을 키운 사람에게 바깥세상은 쉽게 믿을 곳이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두렵다는 이유로 딸의 선택까지 대신할 권리를 얻지는 않는다.
영화가 부녀를 떨어뜨려 놓은 선택은 그래서 좋다. 밥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윌라는 위험을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딸을 찾는 이야기 안에 딸이 제 길을 찾는 이야기가 생긴다.
물론 행동한다고 해서 속마음까지 충분히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로 피할지 정하는 모습과,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들려주는 일은 별개다. 영화는 앞의 일에 훨씬 많은 시간을 쓴다.
그래서 나는 윌라를 잘 쓴 인물이라고 선뜻 칭찬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를 단순한 구출 대상으로 만든 영화라는 판단도 거부한다. 부족한 것은 행동할 자리가 아니라, 그 행동을 자기 말로 설명할 시간이다.
이 차이는 밥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꾼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얼마나 멋지게 나타나느냐가 아니다. 딸이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그 아버지를 이렇게까지 허둥대게 만드는가?
목욕가운은 아버지의 권위를 벗긴다
디카프리오의 허둥대는 몸은 아버지가 늘 앞서야 한다는 믿음을 흔든다. 인피니티의 단단한 태도는 딸이 늘 뒤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깬다.
밥의 목욕가운 도주에서 좋은 것은 망가진 옷차림만이 아니다. 디카프리오는 딸을 지키려는 마음과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함께 보여준다. 서두를수록 능숙함보다 다급함이 먼저 드러난다.
혁명의 경력과 아버지의 위엄을 모두 걸고 출동한다. 목욕가운이다.
영화는 그 허둥대는 몸을 긴 촬영으로 따라간다. 짧게 웃기고 다음 장면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나는 웃음이 나다가도 저 몸으로 딸에게 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서 디카프리오가 믿게 만드는 것은 실력이 아니다. 준비가 덜 됐어도 멈추지 않는 태도다. 밥을 무능하다고 부르기는 쉽지만, 그 말만으로 이 연기를 설명하면 가장 좋은 부분을 놓친다.
그가 잘 달리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 달린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아버지의 자격을 적을 제압하는 솜씨에서 찾지 않는다. 딸에게 가려는 노력을 우스운 몸 안에 끝까지 남겨둔다.
반대로 인피니티는 윌라가 따로 탈출하는 동안 단단함과 불안을 함께 붙든다. 위험 앞에서 움직인다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태도에는 버틸 힘이 있고, 그 힘을 써야 하는 부담도 있다.
나는 이 연기가 밥의 절박함을 돋보이게 하는 데 머물지 않아서 좋다. 윌라에게도 자기 몸을 지켜야 하는 당장의 일이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증명하려고 위험 속에 놓인 딸로만 남지 않는다.
두 배우를 나란히 보면 보호하는 쪽과 보호받는 쪽을 쉽게 나누기 어렵다. 밥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윌라에게는 판단할 힘이 있다. 그렇다고 딸이 강하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군인 록조를 맡은 숀 펜은 굳은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남을 통제하려는 위협을 드러낸다.
밥을 돕는 세르히오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는 경찰 앞의 느린 움직임으로 밥의 공황을 받아낸다.
이 느긋함 덕분에 밥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도 풀린다. 도움받는 아버지가 곧 쓸모없는 아버지는 아니다. 영화는 그의 위엄을 덜어내면서도 딸을 향한 책임까지 벗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의 허술함을 웃기는 일이 정치의 무게까지 가볍게 만드는가?
웃긴 아버지라고 책임까지 가볍지는 않다
정치가 장식에 머문다는 비판에는 일부 동의한다. 하지만 밥을 웃긴다고 해서 딸을 향한 책임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국경과 이민 단속의 폭력은 이 영화에서 실제 위협이다. 다만 영화는 그 폭력이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오래 붙들지 않는다. 곧 누가 쫓고 누가 달아나는지로 관심을 옮긴다.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이 있다. 단속당하는 사람들의 사정보다 추격의 속도가 앞서면, 이들의 고통은 주인공을 위협하는 배경에 머문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영화가 너무 서두른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밥의 우스운 도주까지 같은 잘못으로 묶지는 않겠다. 영화는 밥이 허둥대는 동안에도 윌라의 탈출을 번갈아 보여준다. 아버지에게 웃음이 터졌다고 딸의 위험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연결을 조니 그린우드의 반복적인 피아노와 타악기가 붙든다. 화면 속 인물이 바뀌어도 음악은 마음을 놓게 두지 않는다. 웃고 나서 숨을 돌리려는데, 윌라는 여전히 자기 힘으로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에게 각자의 일이 있다는 점이다. 밥의 다급함이 딸의 행동을 대신하지 않는다. 윌라의 단단함도 아버지가 손을 놓아도 된다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
밥이 세르히오의 도움을 받는 전개도 같은 이유로 좋다.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딸에게 갈 길도 열린다. 아버지의 체면을 지키느라 도움을 거절했다면, 나는 그쪽이 더 무책임하다고 봤을 것이다.
아이를 지키는 일에는 단독 수행 가산점이 없다. 딸을 찾으러 가는 길이지, 혼자 해내기 대회에 출전한 게 아니다.
도움을 받는다고 밥이 해야 할 판단까지 남에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는 딸에게 다가가야 하고, 딸이 자신과 다른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도 감당해야 한다. 세르히오는 그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밥이 움직이게 돕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웃음은 밥을 면제해 주는 웃음이 아니다. 대단한 아버지라는 포장을 걷어낸 뒤에도 무엇을 할지 묻는 웃음이다.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선택을 지지한다.
이 책임의 이야기를 원작 《바인랜드》와 나란히 놓으면, 영화가 줄인 것과 남긴 것이 더 선명해진다.
혁명의 역사보다 딸의 오늘을 앞세웠다
영화는 원작의 복잡한 과거를 줄이고, 부모의 실패를 딸의 의무로 넘겨도 되는지 묻는다. 나는 혁명의 역사를 넓게 펼치기보다 딸의 오늘을 앞세운 이 선택을 지지한다.
토머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는 부녀 관계에서 시작해 과거 운동과 국가 개입의 역사를 펼친다. 반면 영화는 과거를 설명하는 일보다 지금 딸을 찾아 움직이는 일을 앞세운다.
시대도 달라졌다. 소설의 레이건 시대와 과거 운동에 관한 회고는 현대의 국경과 이민 단속 문제로 옮겨온다. 부모가 겪은 위협은 딸이 당장 피해야 할 위험이 된다.
아버지를 바꾼 점이 특히 중요하다. 원작의 아버지 조이드는 혁명가가 아니지만, 영화의 밥은 직접 행동했던 인물이다.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에게 이제 딸을 어떻게 키웠는지도 함께 묻는다.
이 변화 덕분에 밥은 과거의 피해자로만 남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선택과 딸에게 남긴 위험을 함께 감당해야 한다. 나는 그 책임을 딸에게 대신 지우지 않는지가 더 궁금하다.
아버지에게 절실했던 신념이 딸에게도 똑같이 절실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윌라는 부모의 과거를 이해할 필요는 있어도, 부모가 살던 방식까지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부모의 과거까지 자녀의 필수 이수 과목으로 넣을 수는 없다. 수강 신청도 안 받았다.
《레 미제라블》을 함께 떠올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작품 모두 어른이 앞서 내린 선택이 다음 세대의 삶에 무엇을 남기는지 묻는다. 과거의 사연이 절박하다고 해서 젊은 사람의 미래까지 대신 정해도 되는가.
《레 미제라블》이 앞선 선택의 결과를 다음 세대까지 이어 간다면, 이 영화는 그 부담을 부녀의 추격으로 좁혀 붙든다. 밥에게 딸을 찾는 일은 급하다. 그러나 윌라에게는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일만큼 자기 삶을 고르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원작을 줄였다는 사실 자체를 손실로 세지 않는다. 설명을 덜어낸 자리에 딸의 행동을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의 오늘을 앞세웠다면, 딸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더 오래 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딸에게 길은 줬지만 속마음은 덜 줬다
윌라에게 자기 길을 고르게 한 방향은 옳다. 다만 영화는 추격을 서두르느라 그 선택이 마음속에서 자라는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
부모가 숨겨온 과거를 알게 되는 일은 위험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믿었던 사람을 앞으로도 믿을지 다시 정해야 하는 일이다. 윌라에게는 도망칠 길뿐 아니라 그 믿음을 고쳐 세울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영화는 딸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하는지보다 다음 위험을 앞세운다. 당장 살아남아야 하니 긴 대화를 넣지 않은 선택은 이해한다. 그렇다고 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 대화뿐인 것은 아니다.
위험을 피하는 판단 사이에도 부모를 향한 감정이 달라지는 순간을 더 담을 수 있었다. 나는 윌라가 어떻게 버티는지는 따라갔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버티고 싶은지는 그만큼 가까이 듣지 못했다.
인피니티는 단단한 태도 안에 상처받을 여지를 남겨 이 부족함을 메운다. 덕분에 윌라는 사정없이 강하기만 한 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가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과 영화가 그 감정을 충분히 펼쳐준다는 사실은 다르다.
배우의 힘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많을수록 각본이 덜 해준 일이 또렷해진다. 윌라가 행동할 자리를 얻었다는 칭찬만으로 이 빈틈까지 덮고 싶지는 않다. 자기 삶을 고르는 사람이라면 그 선택의 이유도 더 들려줘야 한다.
이제 탈출 과정의 반전이 나오니, 알고 싶지 않다면 다음 두 문단은 건너뛰자. 윌라의 탈출에 관여하는 아반티의 변심도 걸린다. 윌라를 넘겼다가 다시 풀어주는 이 인물의 선택은 딸에게 중요한 길을 열어준다.
아반티가 마음을 바꾸는 일 자체가 모순은 아니다. 다만 그 변화가 충분히 쌓이기 전에 길이 열리니, 윌라의 판단보다 다른 사람의 결심이 앞선다. 혼자 살아남아야 독립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도움을 받아 움직이는 딸의 선택은 더 선명해야 했다.
결국 아쉬운 것은 윌라에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화가 그 힘을 어디에 쓰고 싶은지 오래 묻지 않아서다. 이 부족함을 안고도 내가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는, 딸을 붙잡던 아버지가 신뢰를 배우는 쪽에 있다.
딸을 되찾는 것보다 딸을 믿는 일이 어렵다
나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지지한다.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의 절박함을 보여주면서도, 그 마음에 모든 권리를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딸의 삶까지 아버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밥의 허둥대는 몸과 부녀의 엇갈린 탈출은 보호와 통제의 차이를 끝까지 붙든다. 다만 윌라에게 행동할 자리를 준 만큼 속마음을 들려줄 시간까지 주지는 못했다. 내 별점은 5점 만점에 4점이다. 아버지가 신뢰를 배우는 과정은 좋지만, 딸의 마음까지 충분히 들려주지는 못했다.
이 영화의 재미는 아버지가 얼마나 강한지 증명하는 데 있지 않다.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 도움을 받아서라도 책임지려는 데 있다. 목욕가운을 입고 달리는 몸이 영웅의 자세보다 믿음직한 순간도 있다.
허술한 주인공의 웃음과 실제 위험이 함께 움직이는 추격극을 좋아한다면 시간을 쓸 가치가 충분하다. 자녀를 지키는 일과 붙잡는 일이 어디서 갈라지는지 궁금한 사람에게도 권한다. 웃음 때문에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는 영화다.
반대로 혁명조직과 국가 폭력의 관계를 깊게 파고드는 정치극을 원한다면 아쉽다. 윌라의 마음을 충분한 대화로 듣고 싶은 관객에게도 추격의 비중이 크다. 영화가 선택한 속도에는 분명한 대가가 있다.
볼 때는 밥이 적을 얼마나 잘 이기는지보다 혼자 해결하려는 태도가 어떻게 바뀌는지 따라가면 좋다. 부녀의 탈출이 번갈아 나올 때도 딸을 아버지의 도착만 기다리는 사람으로 보지 말자. 윌라도 위험을 판단하고 탈출할 길을 고르고 있다.
이어서 볼 작품은 《레 미제라블》이다. 어른의 과거가 다음 세대에 남기는 책임을 같은 기준으로 따져보기 좋다. 책으로 더 들어가고 싶다면 《바인랜드》에서 영화가 줄인 혁명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나는 딸을 되찾는 아버지보다, 딸의 삶이 자기 것이 아님을 배우는 아버지를 더 믿는다.
자주 묻는 질문 (FAQ)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실화인가요?
특정 실화를 재현한 영화가 아니라, 토머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를 느슨하게 각색한 이야기다. 현대의 국경과 이민 단속 문제를 담지만 인물의 사건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원작 《바인랜드》를 먼저 읽어야 하나요?
먼저 읽지 않아도 부녀의 관계와 추격을 따라가는 데 지장이 없다. 소설은 과거 운동과 국가 개입의 역사를 넓게 펼치고, 영화는 딸을 찾는 현재의 행동을 앞세운다. 영화를 본 뒤 읽으면 무엇을 줄이고 남겼는지 비교하기 좋다.
정치 이야기보다 액션을 기대해도 괜찮나요?
괜찮다. 허둥대는 아버지의 웃음과 딸의 위험이 맞물리는 추격극이 중심이다. 다만 능숙한 영웅이 적을 차례로 제압하는 액션을 기대하면 방향이 다르다.
딸 윌라는 아버지의 구출을 기다리기만 하나요?
아니다. 윌라는 아버지와 떨어진 곳에서도 자기 쪽의 탈출을 이어간다. 다만 행동을 보여주는 시간에 비해 속마음을 들려주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은 있다.
보고 나서 함께 볼 만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레 미제라블》을 권한다. 어른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다음 세대가 얼마나 감당해야 하는지 비교하기 좋다. 두 작품을 같은 줄거리로 보기보다, 어른의 책임이라는 질문으로 나란히 놓으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