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사평

프랑켄슈타인(2025) 리뷰: 아이를 이해한 만큼 아버지를 따져 묻지는 못했다

LUX · 2026년 10월 22일

《프랑켄슈타인》(2025)은 버림받은 아이를 이해하는 데는 끈질기고, 그를 버린 아버지를 따지는 데는 성급하다. 제이콥 엘로디의 연기와 거대한 연구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쪽이 있다. 느린 설명과 서두른 용서가 그 장점을 깎는다는 쪽도 있다.

나는 두 평가를 나란히 놓고 취향 차이로 끝내고 싶지 않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체가 어떻게 살아났느냐가 아니다. 생명을 만든 사람이 왜 그 생명을 돌보지 못하느냐는 질문이다.

과학자 빅터는 어머니를 잃고 엄격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인물이다. 그는 시체 조각을 이어 새 생명을 만들지만, 기대대로 배우지 못하자 학대한다. 죽음을 이기겠다는 사람이 기다리는 일부터 실패한다.

나는 이 영화가 버림받은 생명의 아픔은 충분히 들었지만, 그를 버린 아버지는 너무 빨리 용서했다고 본다.

생명을 만든 솜씨보다 키우는 태도가 문제다

이 영화는 빅터가 돌봄에 실패하는 과정을 날카롭게 보여 준다. 다만 나는 그 실패를 드러낸 만큼 끝까지 책임을 묻지는 못했다고 본다.

빅터가 만든 생명, 곧 피조물은 제이콥 엘로디가 연기한다. 빅터에게는 연구의 결과지만, 막 태어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빅터는 막 태어난 생명에게 자신이 원하는 속도로 배우라고 요구한다. 비극은 그 조급함에서 시작된다.

빅터는 자신이 쏟아부은 노력만큼 피조물도 빨리 배우기를 바란다. 그러나 몸을 완성하는 일과 말을 가르치는 일은 다르다. 생명을 깨웠다고 그 생명의 속도까지 정할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 차이를 견디지 못할 때 빅터는 폭력을 쓴다. 가르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원하는 것은 배움보다 복종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의 연구보다 연구 이후의 태도가 더 무서웠다.

여기서 어린 빅터의 시간이 다시 떠오른다. 엄격한 아버지 아래서 상처받았던 아이가 이제 힘없는 생명 앞에 선다. 자기가 싫어했던 어른의 행동을 자기 손으로 되풀이한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의 상처가 빅터의 면죄부는 아니다. 그 기억은 폭력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할 뿐이다. 피조물이 지금 겪는 고통을 줄여 주지는 않는다.

거대한 연구실은 이 잘못을 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탑과 장치는 빅터의 야망을 드러내지만, 피조물에게 그곳은 갇혀 지내는 공간이다. 같은 건물이 한 사람에게는 성취이고 다른 생명에게는 감옥이다.

나는 이 공간의 아름다움을 높이 산다. 보기 좋게 꾸몄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생명을 만드는 데 쓴 정성이 그 생명을 보살피는 데는 이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죽음을 정복하고 인류의 운명을 바꾸겠다는 포부다. 육아는 남았다.

빅터는 자신이 해낸 일을 바라보느라 눈앞의 존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놓친다. 실패한 실험을 대하듯 굴지만, 피조물은 고쳐야 할 장치가 아니다. 대답을 기다리고 관계를 배워야 하는 생명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질문은 연구가 성공했느냐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성공 뒤에 누가 기다려 주고, 누가 화부터 내느냐로 옮겨 간다. 빅터가 내주지 못한 그 시간을 눈먼 노인은 어떻게 내어 주는가.

눈먼 노인은 빅터보다 제대로 가르친다

눈먼 노인과의 배움은 피조물보다 빅터의 조급함이 문제였음을 증명한다. 배우지 못하는 생명이 아니라, 배울 시간을 받지 못한 생명이었다.

버려진 피조물은 이 노인에게 말과 글을 배운다. 노인은 그의 외모를 볼 수 없고, 흉측하다는 이유로 관계를 끊지도 않는다. 빅터가 실패라고 여긴 존재와 배움을 이어 간다.

나는 이 장면에서 피조물을 경계하던 마음을 풀었다. 큰 몸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그 몸을 가진 존재가 누군가에게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말을 모른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자기 마음을 상대에게 전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영화는 노인과 피조물이 관계를 쌓는 과정으로 그 차이를 보여 준다.

이 장면이 좋은 이유는 피조물의 착함을 증명하는 데 매달리지 않아서다. 그가 배우고 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게 한다. 관객도 노인 곁에서 그를 알아 갈 시간을 얻는다.

그래서 노인의 가르침은 빅터에게 더 불리한 증거가 된다. 피조물에게 처음부터 배울 능력이 없었다는 변명이 무너진다. 다른 상대 앞에서는 자라나는 존재를 빅터는 다그치고 때렸다.

빅터의 교육법을 학교에 제출하면, 학생보다 교사가 먼저 상담실에 불려 간다.

두 사람의 차이는 가르칠 내용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빅터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폭력을 쓴다. 노인은 말과 글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 간다.

나는 이 시간이 영화의 느린 걸음을 정당하게 만든다고 본다. 배웠다는 결과만 알려 주면, 빅터에게 없었던 기다림을 관객도 건너뛰게 된다. 피조물에게 필요한 시간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셈이다.

그렇다고 이 따뜻한 관계가 앞선 학대를 지워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빅터가 주지 않은 것이 얼마나 기본적인 대우였는지 드러낸다. 생명을 창조하는 솜씨 없이도 노인은 그 일을 해낸다.

피조물이 노인에게서 배울수록 나는 빅터를 더 엄격하게 보게 됐다. 그를 이해할 사람이 세상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설명보다 먼저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빅터의 권력과 피조물의 기대를 맞붙이는 두 주연의 연기다.

큰 몸보다 작은 기대가 더 아프다

배우들은 이 관계에서 누가 보호받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다만 그 보호를 여성의 몫으로 돌리는 이야기까지 고쳐 주지는 못한다.

오스카 아이작이 연기하는 빅터는 가르치는 자리에서 권력을 드러낸다. 피조물이 기대를 따라오지 못하자 폭력을 쓰는 순간이 그렇다. 상대의 어려움을 헤아리기보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태도가 앞선다.

아이작의 빅터에게서는 자신이 생명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문제는 그 자부심을 상대를 다룰 권리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말과 폭력적인 행동이 어긋나면서, 그의 오만이 선명해진다.

맞은편의 제이콥 엘로디는 큰 몸으로 그 힘에 의존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빅터가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기다리는 반응이 장면을 붙든다. 몸집으로는 위협하는 쪽인데, 관계에서는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쪽이다.

나는 엘로디가 이 차이를 끝까지 지켜 내는 연기를 높이 산다. 두꺼운 분장과 거대한 몸이 피조물의 연약함을 가리지 못한다. 오히려 그 외형 때문에 작은 기대가 더 아프게 다가온다.

눈먼 노인에게 배우는 장면에서도 그 기대는 이어진다. 빅터 앞에서는 인정받기를 바라던 존재가, 노인 앞에서는 관계를 배운다. 엘로디는 두 시간을 연결해 피조물을 불쌍한 모습 하나에 가두지 않는다.

미아 고스가 맡은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동생 윌리엄의 약혼녀다. 고스는 피조물과 대화하고 그를 감싸며, 그를 말이 통하는 생명으로 대한다. 빅터가 내리지 못한 판단을 이 인물은 관계 속에서 보여 준다.

하지만 고스는 빅터의 어머니 클레어도 함께 연기한다. 같은 배우가 두 인물을 맡으니 엘리자베스에게 어머니의 모습이 겹친다. 그 역시 남자들의 상처를 달래는 역할에 묶인다. 엘리자베스 자신의 바람보다 남성들의 상처를 받아 주는 역할이 앞선다.

그의 다정함은 좋지만, 다정함 밖에서 살아갈 시간도 필요했다. 남자들이 돌보지 못한 자리를 여성이 채운다고 빅터의 책임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눈먼 노인을 연기한 데이비드 브래들리는 엘로디가 배우는 존재로 머물도록 기다려 주는 상대역이다.

배우들이 상처를 이토록 선명하게 만들었기에, 영화가 그 상처 뒤에 놓는 용서는 더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느려서가 아니라 너무 설명해서 아쉽다

느리다는 비판에는 절반만 동의한다. 배움을 기다리는 시간은 필요하지만, 이미 보여 준 부자 관계를 대사로 다시 설명하는 시간은 줄여도 됐다.

눈먼 노인과 피조물이 함께하는 장면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말을 익히고 상대를 알아 가는 과정 자체가 빅터의 실패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덜어내면 돌봄의 차이는 사라지고 배웠다는 결과만 남는다.

내가 답답했던 것은 기다림이 아니라 반복이다. 어린 빅터가 겪은 폭력과 그가 피조물에게 쓰는 폭력은 이미 이어져 있다. 관객은 두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아챈다.

그런데 영화는 부자 관계의 뜻을 대사로 거듭 강조한다. 행동으로 이해한 내용을 말로 다시 들으면, 인물을 지켜보던 자리에 설명을 듣는 기분이 들어선다. 나는 빅터의 잘못을 더 발견하고 싶은데, 영화는 알아들은 내용을 재확인한다.

누가 잘못했는지 장면이 말했는데, 대사가 출석 확인을 한 번 더 한다.

물론 이 반복이 겨냥하는 바는 분명하다. 빅터를 죽음에 도전한 천재보다 돌봄에 실패한 아버지로 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뜻이 이미 충분히 전달됐다는 데 있다.

여기서 원작과의 차이도 중요해진다. 메리 셸리의 소설은 버림받은 피조물에게 공감하면서도, 그가 무고한 사람을 해친 책임을 크게 묻는다. 상처받았다는 사정이 이후의 가해까지 덮어 주지는 않는다.

델 토로의 영화는 피조물의 가해 책임을 줄이고 빅터의 책임을 더 크게 만든다. 원작을 그대로 옮기려는 영화가 아니다. 버림받은 아이와 그를 다치게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앞세운다. 나는 그 선택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바꿨다면 설명보다 책임을 감당하는 과정에 시간을 더 써야 한다. 빅터가 왜 이런 어른이 됐는지는 이미 충분히 알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가 자기 행동을 어떻게 돌아보느냐다.

폭력의 이유를 이해하는 일과 폭력의 책임을 다루는 일은 다르다. 영화는 앞의 일에는 여러 차례 공을 들인다. 그래서 뒤의 일에도 그만큼의 무게를 기대하게 된다.

빅터의 책임을 원작보다 크게 세운 각색이라면, 그 책임을 다루는 마지막 걸음도 더 무거워야 한다.

용서를 택할 권리와 용서받을 자격은 다르다

이제 결말의 방향을 이야기한다. 피하고 싶다면 다음 소제목으로 건너뛰어도 좋다. 나는 피조물에게 용서를 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빅터의 책임까지 충분히 물었다는 뜻은 아니다.

피해를 입은 존재에게 끝까지 미워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부당하다. 피조물은 빅터를 벌주기 위해서만 살아야 하는 생명이 아니다. 자기 삶을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자유도 그에게 있다.

내가 따지는 것은 그 자유가 아니라 영화가 배분한 시간이다. 빅터가 상처를 주는 과정은 길고 구체적이다. 반면 자기 잘못을 돌아보는 과정은 그 무게를 받아내기에는 짧다.

관객은 그가 어떤 아버지 아래서 자랐는지 안다. 자신이 만든 생명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도 봤다. 그래서 반성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과 책임을 졌다는 사실을 구분하는 시간이다. 빅터가 괴로워한다고 피조물이 받은 상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가 이 차이를 조금 더 오래 붙들기를 바랐다.

용서로 폭력의 반복을 끊겠다는 선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선택을 존중하는 일과 거기까지의 전개를 납득하는 일은 별개다. 나는 앞의 뜻에는 마음이 움직였지만, 뒤의 속도에는 따라가지 못했다.

특히 피조물은 말과 관계를 배우는 시간을 충분히 거쳤다. 관객은 그가 달라지는 과정을 지켜봤기에 그의 마음을 믿는다. 빅터에게도 자기 행동을 새롭게 이해하는 시간이 그만큼 필요했다.

같은 질문으로 이어 볼 작품은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다. 그 영화 역시 아버지가 자신이 만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가를 묻는다. 두 작품의 아버지는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로 평가해야 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프랑켄슈타인》의 가장 큰 성취는 창조의 기적이 아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생명에게 충분한 시간을 돌려준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반성에 배정된 짧은 시간이 더욱 아깝다.

그 아쉬움 때문에 엘로디의 연기와 배움의 장면까지 낮춰 볼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장면들이 훌륭할수록 용서에 이르는 걸음도 더 단단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를 권한다. 아버지를 너무 쉽게 놓아준 영화지만, 아이를 바라보는 눈만큼은 믿는다.

아이에게 준 시간만큼 아버지에게도 물었어야 했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에 시간을 쓸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버림받은 생명이 말과 관계를 배우는 과정을 이토록 정성껏 지켜보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다치게 한 아버지에게는 같은 끈기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엘로디의 연기와 눈먼 노인에게 배우는 장면이 이 영화의 평가를 끌어올린다. 감점의 이유도 분명하다. 빅터의 폭력을 오래 쌓아 놓고, 그가 잘못을 돌아보는 과정에서는 서두른다.

괴물의 습격보다 버림받은 존재의 마음이 궁금한 관객에게 권한다. 거대한 몸 안에 남은 작은 기대를 따라가는 재미가 크다. 연구실의 아름다움도 그 기대가 갇힌 장소라는 사실과 함께 볼 때 더 아프다.

반대로 빠르게 몰아치는 공포를 원한다면 이 영화는 맞지 않는다. 원작이 피조물에게 물었던 가해 책임을 그대로 기대해도 어긋난다. 가해자의 구체적인 책임 이행을 중시한다면 후반의 속도가 특히 아쉬울 것이다.

볼 때는 피조물이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보다 상대가 얼마나 기다려 주는지 보라. 빅터와 노인의 차이는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 기다림에 있다. 연구실 역시 발명의 장소보다 누군가 살아야 하는 공간으로 바라보면 좋다.

이어서 볼 작품은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다. 만든 아이를 자기 기대에 맞추려 하는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지 비교해 보라. 두 영화 모두 아버지의 자격은 창조의 순간이 아니라 그다음 태도에서 갈린다.

이 영화는 아이를 이해하는 데 성공했고, 아버지의 책임을 끝까지 묻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이 아이가 용서할 권리는 믿는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책임까지 끝났다고 믿지는 않는다.

내 별점은 5점 만점에 3.5점이다. 눈먼 노인 곁에서 피조물이 배워 가는 시간과 엘로디의 연기는 그 값을 한다. 다만 빅터에게 쌓아 둔 책임을 끝까지 묻지 못해, 더 높은 점수는 주지 않는다.

★★★★☆ (4/5) — 아이의 상처는 깊이 듣고 아버지의 책임은 서둘러 덮는다

자주 묻는 질문 (FAQ)

《프랑켄슈타인》(2025)은 실화인가요?

실화가 아니라 메리 셸리의 1818년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과학 실험의 사실성보다 생명을 만든 뒤의 돌봄과 책임에 초점을 맞추면 더 잘 읽힌다.

원작 소설을 읽고 봐야 하나요?

읽지 않아도 인물의 관계와 갈등을 따라가는 데 문제가 없다. 다만 원작을 그대로 옮긴 영화는 아니다. 피조물의 가해 책임을 줄이고 빅터의 폭력과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더 강조했다.

무서운 공포영화를 못 보는데 괜찮을까요?

시체 조각으로 생명을 만드는 설정과 학대 장면이 있어 가볍게 권하기는 어렵다. 다만 빠른 습격과 놀라움보다 버림받은 존재의 외로움과 관계에 무게를 둔다. 무서운 괴물보다 슬픈 괴물 이야기를 찾는 관객에게 더 맞는다.

어디서 볼 수 있고, 무엇을 눈여겨보면 좋나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작품이다. 피조물의 외형보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다림과 조급함을 비교해 보라. 거대한 연구실을 생명의 탄생지이자 그 생명이 갇힌 공간으로 보면 빅터의 실패가 선명해진다.

보고 나서 함께 볼 만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2022)를 권한다. 자신이 만든 아이를 기대에 맞추려는 아버지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차이를 같은 기준으로 따져 볼 수 있다.

김지훈 기자
ALJIstory 편집장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진실을 파고드는 심층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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