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앞에서, 먼저 고백해야 할 것

영화관 불이 꺼지고 첫 장면이 뜨는 순간부터 이미 알 수 있었다.
이건 관객을 배려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걸. 자막으로 던져지는 낯선 지명과 가문명, 설명 없이 흘러가는 정치적 함의들. 드니 빌뇌브는 프랭크 허버트의 방대한 원작을 친절하게 요약해줄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그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이 오만함이야말로 《듄》(2021)이라는 영화의 정체성을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단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오만함은 대부분 정당화된다.
이 영화를 두고 “올해 최고의 영화”라거나 “SF 영화의 새로운 기준”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던 걸 기억한다.
그 찬사에 반쯤은 동의하고, 반쯤은 고개를 젓게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완성될 예정인 어떤 것의 서곡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보느냐, 모르고 속아 넘어가느냐에 따라 관람 경험은 완전히 달라진다.

압도적인 것은 분명하다
먼저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 영화의 시청각적 성취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촬영감독 그레이그 프레이저가 잡아낸 아라키스의 풍경은 인간을 한없이 작은 존재로 만든다. 거대한 샌드웜이 모래 위로 솟구치는 순간, 카메라는 그것을 영웅적으로 찍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종이 얼마나 하찮은 침입자인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찍는다. 이 시선의 선택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얼마나 신중하게 설계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스 짐머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익숙한 오케스트라 대신 여성 합창과 타악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체 제작 악기들로 소리의 지형을 새로 짰다.
그 결과물은 웅장하다기보다 이질적이다.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하게 만든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스펙터클에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감동적인 브라스 사운드”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에서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 편집상, 음향상, 시각효과상까지 여섯 개 부문을 휩쓸었는데, 이는 기술적 성취에 대한 평단의 이견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야기는 어디 있는가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절반 지점, 폴 아트레이데스가 프레멘과 조우하기 직전에서 끝난다.
그것도 극적인 절정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예고에 가까운 방식으로. 기승전결이라는 익숙한 서사 구조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승(承)에서 필름이 갑자기 끊긴 듯한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런 반응은 흔했다. 이 영화를 “두 시간 삼십 분짜리 예고편”이라 부르는 냉소적인 평가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변명은 가능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제작 환경, 방대한 원작을 한 편에 욱여넣었던 1984년 데이비드 린치 버전이 남긴 실패의 교훈, 그리고 정치극에 가까운 원작을 ‘반지의 제왕’처럼 동시 다발적으로 찍기엔 흥행 리스크가 너무 컸던 스튜디오의 셈법까지. 이 모든 맥락을 이해하고 나면 이 영화의 선택이 나름의 합리성을 갖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평론가로서 나는 맥락과 결과를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믿는다. 제작 환경이 아무리 어려웠어도, 관객이 마주하는 건 결국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빌뇌브는 영화적 완성도보다 다음 편에 대한 약속을 택했다. 그 도박이 다행히 흥행으로 보상받았을 뿐, 이 영화 단독으로 판단한다면 이야기로서는 미완성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백인 구원자 서사라는 오래된 그림자
기술적 성취와 서사 구조보다 더 예민하게 다뤄야 할 지점은 이 영화가 서 있는 이념적 자리다. 폴 아트레이데스는 사막 행성에 도착한 백인 귀족 청년으로, 원주민인 프레멘 부족의 예언된 구원자로 서서히 받아들여진다.
이 구조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부터 ‘아바타’까지 할리우드가 수십 년간 반복해온 백인 구원자 서사의 골격을 그대로 따른다.
빌뇌브 본인은 이 영화가 그 트로프를 비판하는 쪽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폴이 자신의 예지 속에서 자신이 촉발할 학살과 성전(지하드)의 장면들을 미리 목격하며 괴로워하는 장면들이 실제로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이는 분명 단순한 영웅 서사와는 결이 다르다.
그러나 의도가 결과를 완전히 세탁해주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뼈아픈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토리 자체보다 캐스팅과 제작 방식에 있다.
요르단과 아랍에미리트의 사막에서 촬영하고, 프레멘의 의상과 건축, 언어에 이슬람과 중동 문화의 시각적 코드를 가득 채워 넣으면서도, 정작 그 문화의 실제 주체인 무슬림 및 서남아시아·북아프리카(SWANA) 배경의 배우와 스태프는 주요 배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거의 전원이 백인으로 채워진 반면, 프레멘은 흑인 또는 중동계 배우들로 구성된다.
문화적 기호는 가져다 쓰면서 그 기호를 만든 사람들의 자리는 비워두는 방식. 이건 원작 소설이 안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적 한계를 영화가 계승한 것을 넘어, 오히려 심화시킨 지점이라고 봐야 한다.
빌뇌브가 아무리 세련된 미장센으로 이 세계를 그려낸다 해도, 그 아름다움이 누구의 이야기를 대신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실패작인가.
그렇게 단정하기엔 이 작품이 남긴 파장이 너무 크다. 국내에서도 개봉 20일 만에 관객 100만을 넘겼고, 전 세계적으로 4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올렸으며, 무엇보다 반세기 넘은 원작 소설을 다시 베스트셀러 매대로 불러들였다.
이건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한 편의 영화가 죽어가던 고전 SF 문학에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준 드문 사례다.
그리고 이 영화가 후속작 ‘듄: 파트 2’를 통해 스스로의 결함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수정해나갔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첫 번째 영화에서 수동적 소품에 가까웠던 프레멘 여성 차니 캐릭터는, 두 번째 영화에 이르러 폴의 신격화에 반문을 던지는 비판적 시선으로 재구성된다.
이것은 빌뇌브가 첫 영화에서 남긴 이념적 빚을 뒤늦게라도 갚으려 한 흔적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그 빚이 두 번째 영화에서 완전히 청산되었는지는 또 다른 논쟁거리이고, 적어도 첫 번째 영화만 놓고 보면 그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결론: 위대한 서곡, 그러나 서곡일 뿐
결국 이 영화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듄》은 SF 영화가 이룰 수 있는 기술적 정점 중 하나를 보여주었지만,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웅장한 스케일과 절제된 스타일,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이렇게 진지하게 다룬 블록버스터는 드물다.
동시에 이 영화는 자신이 비판하려는 서사의 함정에 절반쯤 발을 담근 채로, 그 함정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좋은 영화는 때로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듄》이 남긴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아름답게 찍힌 착취의 풍경을 걸작이라 부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이 영화를 스크린 밖으로 데리고 나와 오래 곱씹게 만드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오래도록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것.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최종 판단이다.

FAQ
듄(2021)은 원작 소설의 어디까지 다루고 있나요?
영화 《듄》(2021)은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 1권 가운데 약 절반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폴 아트레이데스가 프레멘과 본격적으로 함께하기 직전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완결성을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많은 평론가들은 《듄》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 거대한 서사의 서곡으로 평가합니다.
듄(2021)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듄》은 압도적인 영상미와 사운드 디자인, 미술과 시각효과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아라키스의 거대한 풍경을 담아낸 촬영, 한스 짐머의 독창적인 음악, 현실감 넘치는 음향과 시각효과는 현대 SF 영화의 새로운 기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기술적 성취를 바탕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 편집상, 음향상, 시각효과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듄이 ‘백인 구원자 서사’ 논란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화는 외부에서 온 귀족 청년 폴 아트레이데스가 사막의 원주민인 프레멘의 예언된 지도자로 받아들여지는 구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정은 과거 할리우드에서 반복되어 온 ‘백인 구원자(White Savior)’ 서사와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감독은 이를 비판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라고 설명했지만, 중동과 북아프리카 문화에서 많은 요소를 차용하면서도 실제 해당 문화권 인물들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 논란도 함께 제기되었습니다.
듄(2021)만 봐도 이야기가 완결되나요?
아닙니다. 《듄》은 후속작을 전제로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감상하면 서사가 중간에서 끝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듄: 파트 2》까지 이어서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두 작품을 함께 볼 때 폴의 성장과 정치적 갈등, 프레멘과의 관계가 비로소 하나의 서사로 완성됩니다.
듄(2021)은 지금도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인가요?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비록 이야기의 완결성에는 아쉬움이 남지만, 압도적인 영상미와 음향, 세계관 구축 능력만으로도 현대 SF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입니다. 또한 권력과 종교, 식민주의, 환경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어 단순한 블록버스터를 넘어 여러 관점에서 해석하고 토론할 수 있는 영화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